티스토리 뷰
전력 참여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길을 조심히 걸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사각거리는 소리에 숨소리가 조금씩 가빠지는 듯 했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은, 릭은 조심스럽게 길의 끝을 쳐다보는 것을 택했다. 발에 닿는 부드러운 흙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이 길을 왜 걷게 되었더라, 공허했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 공허한 생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남은 것이라고는 땅에 지탱하고 있는 두 발바닥뿐이었다. 뭘 잊었더라, 뭘 잊고 이렇게 걷고 있었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릭은 담담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길의 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손바닥에 무엇인가 놓은 듯 기분이 들었다. 그 것을 잊고 걷는 것은 기분이 오묘했다.
****
‘그가 보이질 않다.’
눈빛에 서린 시린 안광에 아무도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시퍼렇게 쳐다보는 안광, 그리고 무표정이 그의 분위기를 짐작해주는 듯 했었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입에 담배를 물려들자 날파리처럼 모인 것들이 그를 감쌌다.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내 입에 물던 담배를 내려놓았다.
“애석하게도 그대들과 어울릴 이유가 없군.”
그의 고고한 말투에 그들은 쩝 소리를 내면서 라이터를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몸을 돌리려 들었다. 다른 소리에 멈췄지만 그는 그것을 그저 들을 뿐이었다.
“몰락한 귀족 주제에 어디서, 그렇게 굴지? 알 수가 없군.”
몰락한 귀족은 아마도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덤덤하게 그 악담을 듣고 지나치려들었다. 그 악담은 사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리춤에 달았던 검을 뽑아 눈앞에 겨누었다. 그의 말투는 지독하게도 덤덤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하는 귀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그대가 귀족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하찮군.”
“벨져…!”
“정확히 말을 해주길 바라네, 그 이름은 더러운 입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지.”
그는 집었던 칼을 들어 다시 집어넣었다. 위압감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다 몸을 돌렸다. 몰락한 귀족, 그것을 지칭하는 것은 그가 맞았다. 몰락한 고고한 이름. 벨져 홀든. 그 이름은 제 이름이 맞았다.
몰락,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탓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았다. 그의 형제들조차도 아무런 말들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서로 쉬쉬하면서 정리를 하려 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붙잡았다가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이라고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잊어버린, 이름. 몇 번이고 속으로 지웠던 그의 이름이 머리카락의 끝에 잡히는 듯 했다.
‘아름답소.’
‘그대를 무엇이라고 칭하면 좋소?’
‘그대를, 사랑하는 것 같네.’
‘고고한, 그대를 사랑해.’
꾹, 깨물던 입술을 내뱉었다. 지독하게도 큰 열병이었다. 되돌릴 수 없었던 그날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 않는다. 릭, 릭 톰슨 그는 그를 위해서 옳은 선택을 한 것이 맞았다. 애석하게도 그 선택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우습게도 그 쪽이었다. 몇 번이고 잘라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기억의 파편들은 가슴을 찔러댔다. 결코 잘라버릴 수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 듯 했다. 잠깐의 열병이 손바닥에, 그리고 그 것들은 온 몸에 파고들었다.
‘찾아야할까.’
그를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옳은 선택을 한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최면을 걸겠다고 말했던 그 날의 시간과 공간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대를 사랑해.’
‘받아 드릴 수 없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무엇하나 명분이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몸 하나 밖에 없었다. 그것뿐인 저를 사랑할 수 있는가. 몇 겹이고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은 그것을 감히 질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갈 수 없는, 그런 자유를 품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만약 마음을 읽으려고 들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니, 이미 그는 제 손 앞에서 놓쳐버린 이었다. 그것을 왜 그렇게도 부정하려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당신의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소, 나는 떠날 것이오. 우리가 만나지 않았던, 그랬던 시간들처럼 말이오.’
입술을 깨물면서 쓰라린 얼굴로 말하는 말을 귀에 담을 수 없었다. 귀에 쿵, 쿵, 힘겹게 들리는 말들이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는 건가.’
제발 물어봐 주길, 이 오만한 남자는 스스로가 진심을 말할 자신이 없다. 더 하고 싶은 말,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물어봐주길 바랐던 시간이 무색했다. 그는 이내 내뱉었다. 씁쓸한 표정과 여운을 남기는 말투로.
‘없소.’
그렇다면, 그 또한 없는 것이었다. 서로, 쉽게 포기하는 것이 어쩌면 빠를 수도 있었다. 그 짧은 말에 가슴이 쓰렸다. 시리게 쓰리는 가슴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으랴, 사라지는 공간의 일그러짐 앞에서 눈을 감았다.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을뿐더러, 되돌릴 일이 될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말은 날카롭게 하나의 검이 되어 가슴에 파고들게 만들었다. 그 파고든 검은 양날의 검이었다. 파고들었던 것은 쉽지만, 빠져드는 것조차도 어려운 것이었다. 양날의 날이 빠져 나갈 수 없게 살과 살을 잡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양날의 검과도 같은 사람이 그이었다. 가볍게 들어온 그가 무색하게 남은 것들은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를 사랑했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지독하게 앓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어쩌길 바라오?’
그래, 그대. 내가 어쩌길 바라는 지 묻고 싶군. 붙잡고 있었던 시간을 놓아보려 애썼다. 달콤하고도 조금 쓴 것들이 온 몸을 휘감았다. 빌어먹을. 그대가 했었던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되돌리고 싶군. 그랬다면 현재의 내가 이리도 지독하게 그대를 찾을 수는 없겠지.
덤덤하게 쥐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이제 제 곁에 없었다. 그랬던 것처럼, 곁에 없는 것은 종이의 고리처럼 쉽게 끊어지려 든다. 선택, 선택이 틀려버렸다. 어느새 축축해진 얼굴을 마른 손바닥으로 훔쳐들었다.
‘그대를….’
****
멍청해진 몸을 끌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그가 되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가만히 멈출 이유는 없던 것이었다. 그는 어디론 가로 떠나는 것을 즐겨했으며, 그리고 그 공간을 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보여주는 미소에 저 또한 웃음 짓고야 말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고자했었던 곳, 그리고 우리의 시작이길 바랐던 곳에 그는 서있었다. 울창한 나무, 그리고 아래를 서로를 내려 보던 강했던 달빛의 빛, 코끝을 스치는 담백한 풀의 냄새가 숨이 흐트러지는 것을 포근하게 감쌌다. 설마 한 것이 컸었다. 이곳에 그가 있을까? 그런 한심한 생각, 그런 생각을 잠시 내려두고 달빛에 빠져 주위의 소리를 완전히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 그림자가 제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으며, 시렸던 두 눈은 천천히 꽃이 피는 듯 풀렸다.
“초면이지만, 이런 곳을 아는 당신은 낭만을 아는 것 같소, 실례지만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되오?”
그, 제가 바라던 그의 모습이 서있었다.
“벨져,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질 않는 이름일 뿐이었다. 지레 겁을 먹어버려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고요한 공간에서 이곳에서 말이다.
“아름답군.”
“무엇이?”
“당신이, 그리고 이곳이.”
그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과거의 그에게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기다렸다.”
“무엇을?”
“그대를.”
“농도 그렇게 할 줄 아는 것이오? 오늘 처음 만나지 않았소. 당신도 꽤 재미있는 농을 하는 것 같네.”
“농이라, 어쩌면 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지.”
“벌?”
“그래, 그대를 외면했던 벌.”
캄캄하고, 고요한 그 공간 속에서 들리는 것은 서로의 조용한 숨소리와, 벌레가 우는 소리, 그리고 바람에 흩날려 사각거리는 소리들 뿐, 그의 얼굴을 조심히 쳐다볼 뿐이었다.현재의 그에게 벌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과거의 자신 탓 때문이다. 쳐다보던 얼굴에 달빛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입을 맞추었다.
'사이퍼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윌라드렉 - 절대불변의 법칙 (0) | 2017.01.09 |
---|---|
잭클리 - WHO I AM (0) | 2016.09.11 |
로라드렉 - 믿어선 안될 말 (0) | 2015.09.16 |
릭벨져- take me away part. 2 (0) | 2015.08.17 |
로라드렉 - Ocean Of Light (새벽) (0) | 2015.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