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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뜰 수 없었다. 아래를 내려 보아도 위를 쳐다보아도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큰 부상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은 입을 닫고, 그를 그렇게 시기했던 이들은 그를 보며 놀릴 뿐이었다. 지독하게 오만했던 그 남자는 이젠 장님일 뿐이라고 그더러 손가락 짓을 하며 그를 우습게 여겼다. 혼자 살아가는 그 남자, 아무도 관심도 없었던 그 남자의 눈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꽤나 크게 퍼졌는지 그에게 오는 수많은 육체적 협박들은 그를 지치게 만들어버렸다.
그의 눈을 가리던 천, 아릿하게 아파왔던 것, 그리고 고름이 차버려서 깜빡이는 것조차 어려웠던 것, 연구 도중 폭발물에 휩쓸려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었다. 의사는 희망을 가지라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신체 능력을 본다면 충분히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거짓말. 목소리에서 묘한 떨림의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가망이 없을 테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시력이 감소되어가는 것은 충분히 어느 정도는 느꼈지만, 완전히 시력을 잃는 삶이 이리 빨리 닥칠 줄은 몰랐다. 겨우 겨우 손을 더듬어가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조심해 드렉슬러! 더듬거리던 것이 뜨거운 스프라도 되는 것이었던지 손가락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아픔이 확 올라왔다. 곧 이어서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렸다. 멀쩡히 걷던 용맹했던 용기사는 없고, 한쪽 다리를 평생 절게 된 한 명의 사내만이 존재했다. 그가 어떻게 다친 건진 알 수 없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는 그와 다르게 상실감이 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명예로운 기사이길 원했으니 그랬을 법도 하지. 차가운 물이 손끝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후에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내주는 것 또한 느껴졌다. 뭘 찾을 땐 날 부르도록 해.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오는 시간이 너무 느리다 알베르토. 아직 적응이 되질 않아서 그렇네, 자네가 이해해주길 바래. 그의 말이 얼마나 섭섭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그는 조용히 그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이 전부였다.
로라스와 있을 때에는 서로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라고 해야 맞겠지, 회사는 눈을 잃은 남자와, 다리를 잃은 남자를 다시 찾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기를, 충분한 수당을 넣었으니 편히 쉬라는 말 뿐이었다. 회사에 그동안 얼마나 모든 것들을 바쳐왔던가, 그렇지만 그 둘은 아무런 말조차도 할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제 손을 꽉 쥐는 로라스를 느끼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말을 꺼내려다가 드렉슬러는 이내 포기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리를 잃은 이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그렇게 하고 모든 돈은 당신들의 계좌로 지급하겠습니다. 타라의 아무런 말도 없는 목소리이었다.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앞이 보이질 않는 드렉슬러의 손을 잡았다.
“내 물건은 가져가도 되는 건가?”
뒤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도 부끄러운 목소리가 없었다. 더듬거리면서 길을 걸어가는 그는 이를 예상이라도 하였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단조롭게 했다. 위에서 허가를 내린 것은 당신이 사용하는 창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뿐이면 충분하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극심하게 단조로운 것은 타라가 아닌 오히려 드렉슬러일 수도 있었다. 로라스 옆에 있는 것이 맞는가? 그에게 물었다. 로라스는 성급하게 발을 놀렸다.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는 그에게 그저 짐에 불과했다. 한참 다른 길로 걸어가는 드렉슬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는 너무 적이 많았다. 그를 지키는 것이, 언제나 답이 될 것이다. 로라스는 힘없이 걸어가는 드렉슬러의 머리 위에 조심히 입 맞추었다. 그를 지킬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드렉슬러는 익숙한 그의 연구실의 냄새를 맡았다. 탄 냄새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연구실에 남아있는 물건이 뭐가 있지?”
로라스에게 물었다. 로라스는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딱히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글쎄, 자네의 창은 앞으로 다섯 걸음가면 있지만 그 외에는 딱히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군, 아마도 폭발에 모두 휩쓸린 것 같군.”
그의 말대로 다섯 걸음 앞으로 다가 갔다. 코를 찌르는 금속의 냄새가 드렉슬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드렉슬러는 그의 창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이었다. 평생을 함께 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물건이었다. 드렉슬러는 그것을 손에 쥐었고 들어올렸다. 여전히 무게감은 그에게 맞춰진 것이었다.
“이거라도 얻어서 다행이군.”
그는 그렇게 중얼 거렸다. 연구실을 나갈 것인가? 로라스가 물었다. 아니, 잠시만 기다려. 로라스 내 책상은 어디에 있지?
“왼 편으로 여섯 걸음 걸으면 있는 것 같군, 그러나 회사에서 내준 것은 자네 창만이 아니었던가?”
“회사에 기여한 게 얼마나 되는데,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은가? 억울하지 않냐? 네 녀석의 창과 갑옷을 모두 수거해간 새끼들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네, 모두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너는 내가 만든 창까지 그렇게 쉽게 내주었던 거냐?”
“이제는 이 다리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미안하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쉽게 사과를 내뱉었다. 괜찮네, 로라스는 그렇게 내뱉었다. 가슴 한편이 크게 시큰 거렸다. 다리가 그렇게 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드렉슬러가 이내 책상에서 부스럭거리면서 무언가 꺼내들었다. 이걸 열어달라는 말에 그는 쉽게 서랍을 열었다. 들어난 것은 그저 하나의 금속에 불과했다.
“그것만 챙겨두고 가자. 용케도 타지 않았군.”
“이게 무엇인가?”
“말하기도 아깝지. 이 회사를 빨리 나가자고, 그렇게도 바라던 기나긴 휴가다. 알베르토.”
“…그렇게 되어버렸군, 자네가 그렇게도 바라던 휴가가 이렇게 길게 올 줄은 몰랐지.”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드렉슬러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미안하다. 이렇게 의지 할 줄은 몰랐다. 그의 말에 로라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의 손목을 쥐는 것이 전부이었다. 서로가 이렇게 의지가 되었던 것이 얼마만이더라, 드렉슬러는 회상했다. 그의 앞에서 어렸던 녀석은 그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끝나도, 그의 곁에 남아 주었던 것이었다. 결국은, 치열했던 그의 삶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푸른빛을 지독하게도 보여주었던 남자 뿐 이었다. 그 남자는 그의 손을 우직하게 잡는 것으로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걷는 걸음이 엇나가지만 그를 의지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삶은, 너무 빨리 와버린 것이었다.
“네 가문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냐?”
로라스를 따라 걸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또 실수해버렸군. 드렉슬러가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최강의 능력자를 키워두었건만, 그 능력자의 체력적인 것이 완전히 병신이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화가 날까, 그는 답이 없었다. 아마도 그의 예상이 맞았을 것이다. 드렉슬러는 조용히 그가 가는 곳을 걸을 뿐이었다.
*******
“어쩌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를 진찰하던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희미하게나마 불빛이 보인다는 그의 말에 자세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희미하게나마 빛의 잔상이 눈에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답은 그에게 좋은 답이 되었다. 아니, 결국은 부질없는 희망이겠지만, 드렉슬러는 까질한 머리를 몇 번 넘겼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혼자 병원에 오는 것 또한 어려워졌다. 로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가 잡는 것을 느껴야 완전히 안심이 되었다. 다리오 드렉슬러가 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꽤나 크게 퍼졌는지 적기사단이 그를 노리고 있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로라스의 대처가 그를 몇 번이고 살렸지만 로라스의 몸이 예전과도 다르다는 소문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다리 하나가 없는 기사일 뿐이었다. 로라스는 그에게 말했다. 다리 하나로도 그를 지키겠다고, 왜 그러냐는 말에도 그는 침묵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개새끼. 그는 그렇게 말하는 걸로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것만 같았다.
“의사가 뭐라고 하던가?”
“희망을 가지라고 하던데, 나는 그 걸 못 믿겠다.”
“어째서? 불빛이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뿐이지, 불빛이 잠시 보였다고 해서 보일 리가, 하루살이같이 기대감만 품을 뿐이다. 차라리 그런 기대는 없는 것이 나아.”
“아마도, 자네 능력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 자네와 나처럼 신체 능력자들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는 가설이야.”
“그렇다면 네놈 다리가 되돌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
드렉슬러의 날카로운 말은 로라스에게 비수처럼 박혀들었다. 그렇다. 그의 가설대로라면 그의 다리는 되돌아야한다는 사실이었다. 로라스는 말을 더 이상하지 않았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후회하는 것을 느낀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잃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눈은 그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실수로 있었던 일이라고 그는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그의 총명한 눈빛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실수했다.”
침묵 속에서 그가 말했다. 그는 사과를 너무 잘하게 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처럼, 아니 그래야만 할 것만 같은 사람처럼 그에게 사과를 몇 번이라고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드렉슬러의 표정을 보았다.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 듯이 그의 얼굴은 어릴 때의 그 모습이었다. 로라스는 괜찮다는 듯, 그의 거친 손을 매만졌다. 그제야 안심이라도 하는 듯 표정이 풀린 그는 금방 약을 타와 그것을 쥐고 먹는 것으로 말을 끝냈다. 약의 성분에는 수면제 성분이 조금 들어갔는지 금세 조는 그를 겨우 침대에 눕혔다. 로라스는 잠든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그는 결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버려서도 그를 보는 것이 맞았다.
*******
그 날 밤, 임무를 마치고 씻은 후, 드렉슬러가 그의 연구의 결실을 봐달라는 말에 그는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로 가는 길에 보이는 매캐한 연기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로라스는 성급하게 연구실로 뛰어 들어갔다. 화마로 가득 찬 곳에 익숙한 남자가 쓰러져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이라도 물의 능력자들을 부를까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 것들이 폭발하고 연구실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불 앞에서 보이는 것들은 절망, 그리고 그 더러 죽어달라고 말하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속삭임, 네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거야? 그럴 수는 없지, 알베르토 로라스, 너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그녀의 속삭임이 보이는 듯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너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녀의 눈빛이 그를 괴롭혔다. 몇 번이고 그 앞을 쉽게 걸어갈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무시라도 하는 듯이 지독한 불속에 들어갔다.
“드렉슬러!”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유리파편이라도 튄 것인지 얼굴에 쉽게 손을 델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없는 드렉슬러를 잡고 일어서는 일이었다. 드렉슬러의 몸은 불에 오래 노출 되었는지 뜨거웠다. 그를 어깨를 잡고 일어서자 천장에 균열이 일어났고 그 소리를 겨우 들었는지 로라스는 그 파편을 피했다. 연구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이라면 누군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무너지려고 하는 위를 바라보았고 그는 전 힘을 다해서 드렉슬러를 밖으로 밀어 던졌다. 드렉슬러의 정신 잃은 몸은 다행히 밖으로 내보내졌다. 로라스는 그 것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몰려오는 고통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지금쯤이라면, 누군가 드렉슬러를 확인했을 것이다.
‘내가 말했지? 넌 결코 행복이라는 것을 적을 자격이 없을 것이라고!’
지독하게 그를 붙잡는 것은 저주가 되었다. 끝없는 저주.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후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것은 다리 하나를 쓰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여러 치유 능력자들이 그의 다리를 보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발견된 시간은 짧았지만 그의 다리는 천장에서 떨어진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다. 다리를 평생 절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그는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드렉슬러의 앞으로 갔다. 너무 오래 불 속에 있었다는 말, 겨우 모든 파편은 끄집어냈지만, 눈은 완전하지 않다는 말에 로라스는 벽을 칠뿐이었다. 그를 지키지 못했다.
“왜! 그를 먼저 구하지 않았던 거야!”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침묵했다. 다리오 드렉슬러 보다는, 그가 우선이었다는 말에 로라스는 진심으로 분노해버렸다. 그의 눈보다는 그의 다리가 우선이었고, 회사의 에이스를 구하는 것이 옳았다고 타라가 그에게 계산적으로 말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가 재차 물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들은 침묵했다.
질린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그들은 답이 없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얼굴을 매만졌다. 파편이 튀었다고 했던 얼굴은 겨우 아물어서 흉터가 드물었다. 그의 눈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한다니, 그의 빛이 꺼졌다니, 그런 말은 거짓이길 바랬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랬더라면, 그의 눈은 완전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그의 연구실로 갔었더라면…! 모든 것이 후회가 되었고, 모든 것은 그의 죄가 되었으며, 그리고 모든 것들은 그에게 다시 되돌아왔다. 로라스는 그의 앞에서 다시 다짐했다. 영원히 그의 옆을 지킬 것이라고, 아무 것도 없는 그를 다시 지켜낼 것이라고 그의 앞에서 조용히 다짐했다.
잠시 졸았던 그가 눈을 다시 떴던 것은 소리치는 드렉슬러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드렉슬러는 잠들었다가 다시 깨었던 것인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냈다. 손등에는 핏줄이 들어설 만큼 강한 떨림이었다.
“정신 차려, 드렉슬러!”
그가 미친 듯이 소리치는 드렉슬러를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껴안았다. 드렉슬러의 손이 눈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보자마자 그를 완전히 안아버렸다. 큰 숨을 들었다 내쉬는 듯 했고 그의 몸은 몇 번이고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귀로는 드렉슬러의 숨이 들렸다. 그가 그 날을 기억하듯이, 그 또한 그날을 다른 방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강했던 남자는, 그가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호흡이 엉망이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손목을 쥐었던 손에 땀이 맺혔다.
“괜찮을 거야 드렉슬러, 괜찮을 거야.”
연거푸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까슬한 뺨에 입을 맞추자 그의 숨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를 테지, 그의 입술에 숭고한 입맞춤을 할 뿐이었다. 그의 숨이 그에게 전달되기를, 천천히 입 맞추자, 그의 숨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다행이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입맞춤을 하고 떨어지려는 찰나, 그의 손이 제 목에 향해 있음을 알았다. 몇 번이고 소리친 쉰 목이 되어버린 그는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베르토, 곁에 있어줘라, 제발.”
그 목소리에 알베르토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저를 괴롭히던 다리도, 그리고 그를 괴롭히던 눈동자도. 다리오 드렉슬러라는 남자를 위해 살아온 삶이 결코 후회가 되지 않을 만큼의 충족감이었다. 그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 그의 혀를 감싸 올렸다. 귀를 간질이는 호흡, 그리고 그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은, 그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목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그를 향해 말하던 목소리, 그리고 그를 향해있었던 모든 것에 숭고하게 입을 맞추었다. 아무 일도, 아무 것도 모를 그라는 것을 알기에,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제를 향해 말한 말은, 제 정신이 아니기에 그렇게 말했을 터이니 말이다. 정말로 괜찮겠나, 이대로라면 자네를 탐할 수도 있어. 로라스는 그를 타일렀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그와 그 사이를 건너고 있었던 길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게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드렉슬러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그에게 닿는 것이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것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
드렉슬러는 온 몸이 뭐에도 물린 것 마냥 화끈 거렸다. 캄캄한 세상에 결국 외로움에 사무쳐서 그에게 안아달라고 말한 것은 저이기에 그는 제 몸을 안아오는 남자의 몸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그를 지키겠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그 남자의 숨소리가 아니었는가? 캄캄한 세상을 결국 보여주는 것은 그가 되었다. 그 남자의 어깨선을 더듬거렸다. 간지러운지 몇 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려주지 않을 거냐, 왜 네 다리가 그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것 아닌가?”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고 드렉슬러는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음에도 부정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그 곳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그는 모를 것이었다. 왜? 네가 왜 나를 위해 그 곳에 뛰어들었냐?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가득했다. 그 불 속에 나를 던져두고 도망가지 그랬나,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눈은 중요한 순간에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나는 자네를 지키고 싶었을 뿐, 그저 그것뿐이었어.”
“멍청한 새끼, 누가 그래달라고 했나?”
“그 결과 목석같은 자네를 얻었으니 그걸로 족해.”
미친 새끼, 드렉슬러는 욕을 지껄이었다. 마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솟을 것만 같았다. 멍청한 새끼, 넌 그래서 안 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이 제 눈을 덮었다. 그의 눈동자는 무슨 색이었더라, 시리도록 푸른빛이었던 것 같다. 그 눈동자를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볼 때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정말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짙었다. 그리고 나는 자네가 아무 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가 뱉은 말이었다.
“내가 자네를 구했다는 사실을 자네가 몰랐으면 했어, 아마도 그걸 안다면 더더욱 죄책감에 빠져있는 것은 자네일 테니까.”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새끼.”
그의 몸을 잡고 몇 번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지독하게 저를 감싸는 어둠보다도, 그를 위해 포기한 그의 몸을 잡는 것이 전부이었다. 미련한 새끼, 그를 그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쉽게 포길 해버린 건지, 그게 무엇이라고 그의 모든 것을 바친 것인가, 더듬거리며 그의 눈과 코 입술을 매만졌다. 눈을 만졌을 때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미세한 속눈썹이 느껴졌고 콧대를 지났을 땐 매끈한 코뼈가 만져졌고, 마지막으로 입술을 만졌을 때 손가락에 입을 맞추는 그 숨소리에 아찔했다. 그 미련한 사내에게 영광의 입맞춤을 그는 해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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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걸 살 생각입니까?”
남자가 재차 그에게 물어왔다. 예 그럴 겁니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반듯한 인상이 돋보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거 정말로 위험합니다. 정말로 연구를 위해서 사는 것이 맞습니까? 제가 아닌 다리오 드렉슬러가 필요하다고 그랬으니 그랬겠죠. 그 남자가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조심하시오, 정말로 위험한 액체이오, 순식간에 폭발해 버린다고! 알겠습니다. 그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접고 그는 그에게 값을 받았다.
그를 가두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멍청하게 그 녀석의 소리를 찾아 손을 움켜쥔다. 거짓말이라고 당장 말해 알베르토. 그에게 물었다. 아쉽게도 거짓말이 아닐세. 다리오. 절망감 아니, 배신감. 그래. 이건 아마도 배신감이 맞을 것이다. 툭툭 떨어지는 것들이 무엇인지 외면하고 다시 외면한다. 이미 물은 엎질러져버렸고, 그 물은 다시 컵에 담을 수 없을 텐데.
증조 1.
이제는 익숙함에 빠져 있었다. 서로가 어떻게 불편한지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 것 까지 완벽하게 익숙함에 빠져 있었다. 그 익숙함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은 제 귀를 간질이는 어딘가 조금 다른 소리였다. 그의 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함을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알베르토, 네 발소리가 다르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네.”
“예전에는 무엇인가 둔탁한 소리가 강했다면, 지금은 무엇인가 소리가 맞는다는 기분이 드는데, 다리가 괜찮아지기라도 한 건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도대체 네가 아는 게 뭐냐 알베르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굳이 파헤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리가 변했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증조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저와 함께할 이유조차도 없을 것이다. 캄캄한 세상 속에서 어쩌면 저 혼자 남겨질 그런 불안감이 머리 뒤편에서부터 천천히 몰려들었다. 이런 불안감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중얼거렸다.
의사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보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눈은 조금씩 희미하게 빛이 보일 정도까지 눈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저를 담당하던 의사의 말로는, 앞으로 꾸준히 치료를 한다면 어쩌면 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그가 그렇게 대답했다. 같지도 않은 희망을 품은 것 만 같아 무엇인가 불안했지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저 친구는 어떻습니까? 다리가 괜찮기는 한 겁니까?”
“저 친군…. 잘 모르겠네.”
“영원히 절게 된다는 겁니까? 일말의 무엇이라도 없는 겁니까?”
“난 최선을 다했네.”
“당신에게 이런 답을 요구한 게 아닙니다.”
“나는 진정으로 몰라.”
하나 같이 무엇이라도 짠 것 마냥 저를 혼란스럽게 구는 말들이었다. 당신이 아는 건 도대체 무엇인데? 나가달라는 의사에 말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천천히 빛이 제 눈을 간지럽혔다. 이건 분명 좋은 증조일 텐데. 좋은 신호일 텐데. 무엇인가 점차 저를 불안감에 빠지게 만든다.
“알베르토. 옆에 있나.”
“당연한 것을 묻나.”
“도대체 숨기고 있는 게 뭐야.”
“그런 것 따위 없는 것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기분 좋게 웃음을 흘리는 목소리. 어떤 것을 숨기고 있지 않은, 그저 그만의 목소리였다. 이 더러운 기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머릿속을 헤집는,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기분이 저를 천천히 감싸댔다. 어쩌면, 제가 날카롭게 생각하는 일이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왜, 네가 왜 그랬는지 도저히 나는 알 수가 없다. 알베르토. 그래, 도대체 왜 그랬는지부터 알자. 왜, 네가 왜 그랬던 건지. 말해봐.
증조 2.
제 눈을 찌르는 날카로운 조각. 파고든 파편은 이미 빠졌지만 무엇인가 눈에 걸린 것 마냥 뻑뻑하다. 눈을 몇 번 깜빡거려도 보이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괜한 희망은 품지 않은 것이 옳았다.
그나마, 옆에 붙어 있는 숨을 내뱉고 있는 존재 하나로 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어 본다. 제가 아는 그 얼굴이 그려지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긴 시간을 함께 살아왔지만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얼굴이 맞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속눈썹을 매만지자 떨리는 눈꺼풀이 느껴진다. 손을 떼어내자 제 손을 끌어 제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안자고 있었나.”
“그럼, 자네가 이렇게 만져대는데 잠이 올수가 있나.”
웃는 소리가 확연히 귀에 박힌다. 기분 좋은 저 웃음소리는 진정으로 저를 향하고 있는 그 소리였다. 조용하게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그가 물었다.
“혹, 어디 불편한가, 드렉슬러?”
“불편한 곳이라, 도저히 모르겠다.”
모르겠다. 전혀. 제 머리를 헤집어대는 이 생각들이 도무지 정리가 되려하지 않았다. 정리를 하려고 하려면, 그건 아냐! 라고 무언가의 본능이 저를 막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가 이리도 의존적이었나? 고작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이리도 나약하고 멍청해졌나?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입술에 있었던 손은 점차 목을 타고 내려가 어깨를 쓸고, 가슴의 고동소리를 손바닥 하나로 느껴대기 시작했다. 천천히 두드려대는 소리는 언제가 제가 듣던 녀석의 것임을 안다.
제가 모르겠다는 소리에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고는 불을 키려는 듯이 천천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이상한 발소리였다. 본능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저 녀석이 절름발이가 아닐 것이라는 가정 아닌 가정을 제 머릿속에서 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다고 저에게 거짓말을 하던 사내인가? 그것은 아닐 텐데…, 아닐 텐데. 그제야 발소리가 조금 둔탁해진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저를 향한다. 따뜻한 온기가 제 뺨에 닿았다. 아마도 그건 그의 손바닥이겠지. 그리고 그 온기는 천천히 제 목과 어깨를 지난다. 아마도 그건 그의 입술이겠지.
“정말로 괜찮은 게 맞나 드렉슬러?”
“아아,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알베르토.”
아마도, 괜찮은 것 같다. 모르는 것이 오히려 나을 지도 모른다. 눈이 조금 아파서 그렇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는다. 그런가. 하고는 약을 찾으러 다시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의식을 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미세한 바닥의 울림소리를 들으면서 약을 찾아온 그가 저에게 컵을 내민다. 고맙다는 말을 잇고는 그 컵을 손에 쥐고 약을 한번 삼킨다.
무엇인가 섞인 것 만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제 눈 속에서 흩뿌려진다. 엉망인 작품을 만든 것 마냥 속이 어지러운 것 같다. 이런 저런 말들을 조금씩 중얼거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제가 느끼는 이 불안감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증조 3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에게 모든 것이 잡혀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다가왔다.
혹여 미련이 남아 무언가 만지려고 하면 위험하다는 듯이 격한 과잉보호가 그것을 예상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만두라는 말투. 그리고 무엇인가 강압적으로 되어버린 그의 태도와 그 상황을 예상하고도 움츠리는 제 자신이 있었다.
내가? 눈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이런 태도를 취해? 이 다리오 드렉슬러가?
그럴 일은 당연히 없는 일임에 분명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벽을 천천히 잡고 제가 기억하는 대로 천천히 길을 걸어본다. 어쩌면 수십 수백 번도 걸어 나왔던 세상임을 알기에 아무런 공포심도 없어야하는 것이 옳았다. 손을 뻗어서 계단 하나를 밟았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옮긴 것 마냥 계단 하나에도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 제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는 온기가 그제야 제 마음을 내렸다. 그제야 저는 수긍하고 말았다. 지나치게 퇴행해버린 인간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수긍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진정으로, 알베르토 로라스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무엇인가 잘못됐다. 그 생각을 너무 늦게 하고 말았다. 그의 팔이 제 허리를 감고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 발소리가 지독하게도 제 머리를 찔러댔다. 멍청하고, 더럽게도 멍청한 꼴, 제가 언제나 말했던 천재라는 이름은 계단 하나도 내려가지 못하는 멍청한 녀석이 되어있었다.
“어디 가려고 했던 건가?”
“그냥, 조금 답답해서 걷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것뿐인가. 그렇다면 내게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말할 이유가 있나.”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나는 자네가 걱정이 되는 걸.”
지독하게, 달콤한 목소리로 저를 헷갈리게 한다. 이 퍼즐들이 머릿속에서 맞춰져가고 있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일들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생각들이 맴돌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말해야해. 보이지 않는 눈은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다만 잡은 온기로, 그 뜨거운 온기 하나로 말하는 것이 전부이었다.
‘아니라고 말해. 알베르토.’
눈가가 아릿하게 아파져왔다.
*****
익숙한 식탁을 두드렸다. 단조롭게 들리는 식기의 소리와 그리고 먹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한숨을 쉴까, 아니면 말을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물을 마시려고 건든 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유리는 아닌지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실수했다.”
그렇게 인정하고는 그 잔을 내버려두었다. 그 컵을 기점으로 그와 저 사이에 묘한 어색한 기류가 있었다. 조심했어야지. 그의 목소리가 그 기류를 깼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 바닥을 닦는 소리, 그리고 잔을 들어 움직이는 소리가 맴돌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식은땀이 나려고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을 걸어볼까. 말을 걸어서? 그 후에는? 그래 사실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한 일들이 전부, 소용없다는 듯, 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확신이 전혀 없었다. 알기 위한 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은 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걸 보았는지, 아니면 들었는지. 마찬 가지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식사 덜한 거 아닌가?”
“얼추 다 먹어가던 참이었지. 그렇게 볼 필요 없네. 드렉슬러.”
어떤 꼴로 보고 있었는지, 제가 어떤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지 저 조차도 모른다. 제 얼굴을 더듬거리고는 제 손을 잡는 그 손을 감히 꽉 잡을 수가 없다. 입술을 꾹 깨물고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인다. 약을 먹으라면 먹고 잠을 자려면 자고, 모든 것들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제 자신이 어디쯤에 있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어쩌면, 두 눈을 잃음과 동시에 저 조차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입을 꽉 깨물었다. 다른, 그래.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 눈에 힘을 주고 보니 얼추 보이던 빛들이 제 앞에 길을 내밀어 주는 것 마냥 반짝거리고 번쩍인다. 수없이 다시 바라보아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제 옆에서 숨을 몰아 쉬어가면서 숨을 내뱉는 이의 소릴 듣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모든 것이 캄캄한 세상 속에 발을 내밀고 천천히 걸었다. 제가 모든 것을 시작했던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댔다. 발소리가 너무 커서 그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벽을 만져대면서 걸어 다녔다.
지금이 몇 시지? 그 것 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던 것은 제 발에 닿는 풀의 축축함과 제 뺨을 스치는 낮은 온기가 차갑다는 것이 새벽인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고 어딘지도 모를 길을 걸었다. 발에 무언가 닿을 때 마다 모르는 그 생소한 것들이 제 발가락을 타고 발목까지 올라온다. 두려움? 아니 그런 하찮은 것들의 생각이 아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로는 저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 다리오 드렉슬러란 이런 존재였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저를 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공포라는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던 저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 될 이유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지나치게 멍청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걷는 이 순간도, 굉장히 불안할 것이다. 저를 노리고 있는 놈들이 언제든지 칼을 빼들고 올 수도 있는 것이었고, 저를 죽일 수도 있는 상황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걷은 순간이, 의미 있게 다가올 줄은 저도 몰랐던 것이다. 어떤 건물과 어떠한 것들을 잊은 채로 걷은 순간들이, 저를 의미 있게 만들었다. 조금 기억을 더듬어서 미리 세어둔 것들을 더듬어댔다. 병원까지 가는 발걸음이었다. 맨발로 걷는 꼴이 우스꽝스럽고 발에 피가 나는 것처럼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들은 잊기로 했다.
늘 걸어온 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제 머리는 그래도 바보는 아닌 건지 걷는 길을 머릿속에서 그려댔다. 다섯 블록, 발로 하나 하나 느껴가면서 걸어 다녔다.
귀를 타고 들리는 모든 소리에 집중해서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제가 기억하는 길 그대로 코너를 돌아갔던 병원의 익숙한 계단 장식을 매만졌다. 그제야 제가 잘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을 돌리자 꽉 잠겨있었다. 시간은 아직 인가. 중얼거리면서 문 앞에 기대어 눈을 조금 붙였더니 어떤 이가 제 몸을 흔드는 것이 느끼어졌다.
“허, 다리오씨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에요?”
간호사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 제 손을 감쌌다. 그녀가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세상에나, 발은 왜 그 모양이에요? 같이 다니시던 알베르토 씨는요? 아니지,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눈도 안 보이는 분이. 우선 들어가요. 발부터 어떻게 좀 하고 알베르토 씨한테 연락을 드리면 될 것 같아요.”
“아니, 그 녀석에게는 연락을 해주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래도 알베르토 씨가 당신 보호자로 되어있는 걸요.”
쓸데없는 짓을 하긴. 쯧 하고 혀를 내쳤다. 간호사가 시작을 여는 건지 온기가 없던 곳에 순식간에 온기들이 차고 차가운 제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감기 걸립니다. 라고 말하던 간호사가 몇 번 종이를 넘기는 소리를 내고 펜이 움직이는 소릴 내며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몇 번 휘갈기는 소리가 끝나고 나서야 발을 보겠다며 살펴보고 소독약을 부어댔다. 따갑다고 소리쳐도 자업자득이라며 오히려 더 눌러댔다.
“간호사 아가씨.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알베르토 녀석은 어떻게 걷나?”
“잘 걸으시죠.”
헙 하고 제 입을 다무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그녀 스스로도 잘 못 말했다는 건지 말을 급하게 바꿔댔다. 제 말은 잘 걷는단 소린 말 그대로 잘 걷는단 소리에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당황한 목소리를 내면서 손을 놀려댔다. 붕대를 감는 손의 떨림이 제 앞까지 오고 있었다.
“아가씨.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운데, 말한 김에 실토 하는 게 어떤가 싶은데.”
“저는 말 한 적 없어요. 다리오씨. 다리 붕대는 감아드렸고 알베르토 씨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지독하게도 입단속을 시켰군. 치밀한 새끼.”
입술을 꾹 깨물고 누워서 잠이라도 주무세요. 라는 간호사의 소리와 진통제를 투여하겠다는 소리. 그리고 어느 새 저는 숨을 고르게 쉬면서 잠에 빠져댔다. 제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점차 눈을 뜨려고 했으나 눈을 감았다. 잘 들리지 않는 소리에 집중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 까지 온 건지. 저도 잘은 몰라요.’
‘후. 사라져서 걱정했더니 이런 무모한 짓을…!’
‘발은 가볍게 응급처치 해뒀었고, 아까 전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냈습니다.’
‘못 살겠군,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이건 뭐 소소한 팁 정도라고 생각하게.’
‘감사히 받겠습니다. 언제나 늘 감사해요,’
‘서로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겠나. 비밀 유지비용으로는 더럽게도 가벼운 비용이지. 그는 언제 깨어날 것으로 보이지?’
‘곧 있으면 눈을 뜰 거예요. 이제 조용히 하는 게 좋겠어요.’
뭔가 하나 둘 씩 퍼즐이 맞춰가기 시작했다. 같지도 않은 약속의 대가가 고작 그거였다. 숨을 천천히 쉬면서 눈을 뜨는 척 몸을 움직여댔다. 바스락 거리는 시트의 소리에 제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발걸음의 소리를 듣는다. 한 걸음. 둔탁한 소리. 다른 걸음. 얇은 소리. 억지로 말을 질질 끌어대는 소리. 그 소리가 어이없게도, 너무나도 어이없게도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떠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침착하게 구는 것을 택하자. 뭣 하나 아는 것 없는 채로 말을 해봤자 하나, 하나 가려진 연막을 탈출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명확한 진실이었다. 무엇인가 가려진 것 마냥,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다.
“눈을 떴나, 드렉슬러?”
“왔나, 알베르토.”
“…자네, 자네 때문에 얼마나 놀란 줄 아나? 평소처럼 눈을 떴는데 옆이 비어있고 집 어느 곳에도 없는 자네가 병원에 있다는 소릴 들은 내가 얼마나 황당하겠어? 발은 다쳐있다고 하지. 뭐 하나 안 보이는 자네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네. 말을 해봐.”
“그냥 걷고 싶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어.”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며 머리를 넘기는 건지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중얼거리면서 화를 어떻게든 눌러대고 있었다. 아마도 제가 볼 수 없는 지금의 그의 표정은 꽤나 가관일 것이다. 화를 내고 싶어도 참아대는 꽉 깨문 입술과 그리고 눈이 아프게 시린 눈동자가 저를 노려보고 있을 테니까. 찬찬히 그려지는 모습에 손을 뻗어 얼굴을 하나, 하나 만져본다. 역시나 그랬다.
“후, 자네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아.”
숨을 겨우 쉬면서 하는 말이라고는 저런 말뿐이다. 모든 것을 다 알아도 지금은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제가 들었다. 이게 뭐라고. 이게 무엇이라고.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은 제 입술을 담백하게 물어오는 입술의 온기에 고개를 틀 뿐이었다.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 덮어두고 눌러대고 드러나지 않기를 제 스스로가 바라면서 그의 가볍게 떨어지는 입술을 제가 더 물어댄다. 한참을 숨을 공유하고 나서야 떨어진 잠시의 침묵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시선을 받는 것뿐이었다.
“집에 돌아가세, 렉스.”
발의 상처가 덧난다는 이유로 꼴사납게 업힌 꼴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어떤 생각인지 저조차도 모를 감정들이었다. 복잡하게 무언가 얽힌 기분이었다.
알베르토 로라스가 얼마나 지독하게 저를 묶어대는지 끝을 보고 그걸 제 눈으로 또렷하게 봐야 만이 알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미로는 저를 어지럽고 어지럽게 만든다. 그 끝이 어떤지 알면서도 발을 딛는 제가 얼마나 멍청할까.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는 몰라야만 했다. 열쇠를 쥔 건 그가 아니라 저 이기 때문이었다. 시작과 끝을 아는 것 또한 저여만 했다.
*********
더, 목을 졸라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더 그랬을 지도 모른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여 댔다. 이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저에게 허락된 자유는 손톱만큼의 자유였다. 이제 슬슬 눈을 떠보고 다니세요. 이 말만 아니었더라면, 자유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눈을 깜빡이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형체 아닌 형체만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서 무언가 벅차올랐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이런 일은 저에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고 의사에게 말을 전달했다. 형체가 저의 손을 꽉 쥐고 자네는 치료만 생각하도록 해 라고 툭툭 쳐댄 손길에 그렇게 물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눈을 뜨기 시작하자마자 조금 더 과감하게 길을 나갈 수 있었다. 그게 더 불안한 모습인 건지 녀석은 저를 꽉 붙잡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저는 손을 치웠다. 그렇게 소극적이고 멍청한 녀석은 눈이 없을 때에 불과해 알베르토. 그를 보며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가지런한 머리, 가지런한 얼굴, 가지런한 옷의 형체가 일렁이면서 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외면한 채로 몸을 돌렸다.
“자네에게 나는 도대체 뭘까.”
덤덤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면서 말을 하고 있을 터였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면서 그 형체에 송곳 같은 말을 내뱉는다. 처음처럼 되돌릴 것같이.
“한 번 몸을 섞은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아니었나.”
입술에 가시라도 문 것 마냥 지독한 단어들을 하나, 하나 제 입에 물고 내뱉었다. 어떤 표정인지는 모른다. 다만, 제 손목을 꽉 쥐고 힘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을 보면, 녀석은 지금 화를 내고 있다. 후 하는 한숨소리가 난 후에야 손목에 몰린 힘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저를 보면서 말을 하려는 듯 했다.
“지독하게도 잔인하군.”
“아니면, 친구였지.”
그것만큼 진실 된 관계는 없었지. 그런 날이 가득 선 말에 손이 놓여졌다. 그 놓인 힘에 별다른 고민 없이 그를 남겨둔 채로 뒤를 돌아 다른 막다른 길을 걸었다. 분명 저에게는 익숙한 곳 들이였으나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손바닥으로 벽을 쓸어대면서 걸음을 재촉해댔다.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을 알아야만 했다. 뒤에 들리는 발걸음 소리가 작아진 것으로 보아, 그는 더 이상 저를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들리지 않은 소리였다.
“어, 자네, 다리오 아닌가?”
익숙한 거리를 조금 걸었을까, 저에게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눈을 찌푸려댔다. 익숙한 몸체였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금 더 가까이 왔을 때 쯤 누군지 확연히 인식해댔다. 제가 유일하게 거래하는 곳의 관리인과 같은 나이가 지긋한 영감. 몇 번 마주치면서 인사를 해댄 영감이었다. 그가 말하는 말을 제가 듣기에 이상한 말들이었다.
오랜만이라며 손을 잡고 악수를 해댄 그가 제 몸을 툭툭 쳐댔다. 그리고 안부를 묻는 기본적인 말들을 저에게 해댔다. 답답함이 들어 그렇지요, 예 예. 하고 말들을 넘겼으나, 그 후에 나온 말들에 저도 모르게 집중을 해댔다.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기 했지만, 멀쩡하네, 내가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 액체는 꽤나 위험하다고.”
“영감,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린가, 자네가 필요하다면서 폭발물질이 들어있는 액체를 구매하지 않았나. 나도 그 구매 내역을 보고 꽤나 놀랐다.”
“내가 거래하는 건 오로지 영감뿐인데, 내가 샀다니, 그런 적은 없었을 텐데.”
“장부에는 자네 이름이 적혀있었지, 나도 잘 몰라. 그 때 가게를 비웠었거든. 할망구가 아프다고 하면서 구느라 자식새끼더러 자릴 부탁한다 했지.”
“이렇게 허술하게 거래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허술 할 줄은 몰랐지. 당연히 자네 이름이 적혀있기에 연구로 사간 줄 만 알았지. 영수증을 헬리오스에 두고 온 참이었는데, 자네가 더 이상 회사 소속이 아니라고 하기에…, 이런 저런 소문을 들었지.”
“결론만 말하자면, 누군가 사칭했단 소린가.”
“그렇다고 볼 수 도 있지. 나는 몰랐어. 자네가 눈을 다쳤다는 소릴 들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어차피, 시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던 것 영감도 알고 있던 사실 아니던가.”
“그랬지. 그래서 더 걱정했을 지도 몰라. 자네는 적을 만들고 다니는 사람이잖나.”
“뭣 같은 소리하긴.”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돌렸다. 다음에 연락하세 라며 제 손에 연락처를 남겨주는 손에 그러면 그렇게 하던가 하고 몸을 돌렸다. 머릿속은 조금 착잡해졌다. 제가 폭발물을 구매했다는 남겨진 기록의 사실이 소름 돋게 이상할 뿐이었다. 푹 한숨을 쉬다가 제 손에 쥐어준 연락처를 주머니에 꾸깃 하게 집어넣었다. 괜한 소릴 들은 기분이었다. 몸을 돌려 가장 익숙했던 건물 앞에 섰다. 눈을 찌푸리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당연하게도 길을 막아댔다. 당연한 곳이라고 생각했건만.
겨우 길을 지나가던 붉은 빛의 머릴 붙잡았다. 붉은 색의 마녀야 뻔하지. 그녀는 제 손을 뿌리치면서 날카롭게 물었다. 왜 찾아왔냐고. 눈은 어떻게 된 거냐고 여러 말들을 해댔지만 저는 모든 말들을 잘라냈다. 제 연구실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럼 들어가 볼 거야? 하고 물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직 까지는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손목을 꽉 쥐고 모든 게 시작된 곳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 시간으로 태엽을 되감아 가는 것처럼. 천천히 모든 것을 되돌리는 것 마냥 기억을 되돌렸다. 제가 기억하는 모든 것의 오류를 찾고 싶은 것처럼 익숙한 자리로 걸어가 앉아 눈을 감았다.
기억 1.
그는 오랜만에 커피를 마셨고,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 담배의 향을 즐겼다. 그 짙은 담배 향은 제 몸을 꽉 채워댔고, 만족스러운 상태로 다시 제 자리에 앉아서 타자기를 눌러댔다. 글자 소리가 툭툭 눌러지면서 논문을 적어대고 있었다. 타닥 타다닥 눌러대는 소리가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 만족스러움을 저는 즐기면서 커피를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후에, 아이들이 제 방으로 놀러와 글을 읽어주세요 라는 말을 했고. 귀찮아하면서도 그 것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들과 잠시 놀아주었다.
기억 2.
그날은 유독 알베르토가 보이지 않았던 일이었다. 당연히 임무를 나겠다고 생각했던 날이기도 했다. 창고에서 부탁한 물건을 가져다 놓았단 말만 해두고는 녀석은 임무를 나갔다. 제 투구를 허리에 두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분명히 보았던 날이었다. 녀석은 저더러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담배는 조금 그만 피우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말에 저는 어땠더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 하고 녀석을 배웅해댔다.
기억 3.
유독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가벼운 갑옷을 만들려는 제 노력이 무색하게 매캐한 냄새가 제 연구실에 가득 찼다. 매캐하고 톡 쏘는 향이 강했다. 제 실수로 무언 갈 잘못 넣었나? 하고 고개를 돌려서 용액이 담긴 병을 조심히 들었다.
그 이후에 드는 생각이라고는 오로지 물음표뿐이었다. 아마도 영감이 말한 것이 그것이었다. 누군가 그랬다는 사실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그만 나가줘야겠어. 외부인은…, 눈은 어때?”
“어렴풋하게 보이는 편이지. 자세히는 아니지만 형체 정도는 보이는 것 같다.”
“그거 다행이네, 알베르토 경에게 감사 하도록 해.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화재에서 죽었을 지도 몰라.”
“그런가. 잘 모르겠군.”
“그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의외네, 언제나 믿던 사람 아니었어?”
“그랬던가. 아무튼, 고맙게 됐어 마녀. 외부인을 여기까지 들어오게 해주다니. 의왼데?”
“놀리지 말라고. 다리오 드렉슬러.”
“다음에 또 보자고 마녀.”
가볍게 인사를 하고 헬리오스 건물에서 나왔다. 제 걸음을 예측이라도 한 것 마냥, 제 고개 아래로 보이는 발에 고개를 들었다.
“쫓아오지 않더니. 결국 따라왔나.”
“그렇게 되었네. 왜, 이것 또한 자네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알베르토.”
“하, 자네만큼 참으로 이렇게 속 타게 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알베르토.”
“무슨 소린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가 저를 향했다. 저는 그 목소리를 외면하듯, 제 팔을 향해 뻗는 손을 걷어치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 녀석과는 다른. 언제나 제 모습이었던 저였다.
“무슨 소리냐고? 오류를 바로 잡고 있다. 네 놈과 나 사이의 크고 큰 빌어 쳐 먹을 오류를.”
격양된 목소리는 저 또한 마찬 가지였다. 제 기억 속의 큰 오류를 바로 잡아야만 했다. 그 오류 속의 변수인 이 남자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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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저 사이에 존재한 것은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빌어 쳐 먹을 오류? 그런 것 이미 제 머리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의심스러운 것이 당연한 오류였다. 제일 먼저 발견해? 제일 먼저 날 감싸? 애초부터 네 녀석이 한 일이 아닌가? 시야를 찾아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이면서 쳐다본 얼굴은 도무지 어떤 얼굴인지도 저는 예상치도 못할 얼굴이었다. 다만, 저는 무엇이든 확실하지가 않았다는 것이었다.
"증명해봐.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방법으로 무엇이든 증명해보란 소릴세."
"…"
"거봐, 지금 자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나. 자네, 차라리 나더러 떨어지라고 말을 해. 이런 치졸한 방법은 자네도 나도 명예롭지 않은 일이 아닌가."
"주둥이만 열렸군.“
한숨을 쉬었다.
"뭣하나 알려줄까. 렉스? 자네는 너무 물러. 스스로 가시을 두르면 뭣하나 그래봤자, 자네는 너무나도 무른 과일에 불과해."
기가 차서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여도,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머릿속에서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르는 분위기, 얼굴의 표정은 읽혀지질 않았다. 네가 웃고 있는지, 아니면 네가 무표정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지나치게 평온한 말투일 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무른 과일이라,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네 녀석 때문에 그렇게 무르고 무르게 되었으니, 날이 선 가시를 걷어냈더니 좋았던가? 말해봐. 알베르토, 나는 아직 들을 생각이 있다. 아직까진, 네가 거짓을 고하던, 진실을 고하던 들을 생각이 있단 말이다.”
“아쉽게도 나는 숨기는 것이 없어, 드렉슬러.”
손을 뻗어 손을 움켜쥐었다. 미세하게 조금씩 떨렸다. 거짓을 고하고 있음을 몸이 말하고 있어도, 그는 진실을 고하지 않았다.
“지금 너는, 기회를 걷어찼다. 그건 네가 바보가 아닌 이상은 알겠지. 들어, 알베르토. 관여 하지 마. 내가 무엇을 하건, 어떤 짓을 하건, 더 이상 관여하지 말란 소리다.”
“렉스.”
숨이 넘어 갈 듯 위태로운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잘못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거둬내는 것은 제 일임에 틀림없었다. 안일하게 넘어가는 것이 아닌, 해결해야할 일임에 분명했다. 그 생각에 이리도 단호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거겠지.
“사랑해. 그게 그토록 잘못 되었던 것인가? 그저 자네를 가슴에 품고 욕정 했을 뿐이야.”
“그게 그토록, 잘못 되었냐고? 그래, 애초에 우리가 애정을 품고 사랑을 할,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우리는 그저 친구였지. 네 생각은 나름대로 대단했다. 지금 내 꼴을 봐라, 이 순간에도 불안감에 빠져있는 건 나 아닌가.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지고 거짓된 사랑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던 아둔한 사람이 나 아닌가.”
“렉스!”
“거짓된 사랑일 것이다. 네 녀석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얼굴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훑었다. 축축하게 남은 물기가, 그가 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감촉, 그 감촉을 따라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 잘 봐라, 알베르토, 네 잘못된 애정의 끝을.”
“드렉슬러!”
아무 말도 없이 뒤를 돌아 걸어댔다. 비틀 거리는 걸음, 뒤에서 붙잡는 힘과 시선을 무시하고 가는 제 걸음은 한 없이 홀가분해졌다. 어디로 갈 지는 저도 모른다. 단지, 그저, 걸었을 뿐이다. 자유를 갈망한 하나의 별처럼.
****
[그를 만날 생각은 없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온화한 여자의 목소리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괜히 수화기의 선만 손가락으로 돌릴 뿐이었다. 글쎄, 아무 말 없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를 만나기에는 아직은, 어려워. 그는 이윽고 쇼파에 몸을 완전히 누웠다. 손을 더듬더듬 거리면서 안경을 손에 쥐었다.
[그를 본다면, 그런 소릴 못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스스로, 제 눈을 찔렀어. 그가.]
“뭐라고?”
쇼파에 완전히 누웠던 그가 벌떡 일어섰다. 급작스레 일어서는 바람에 전화기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마른 손으로 남자는 제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 쓸고는 다시 전화할게, 그녀의 전화를 끊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의 곁을 벗어났고, 벗어남과 동시에 찾아온 고요함과 평화는 드렉슬러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충분했다. 안경을 써야 보이는 옅은 시야는 한 없이 좁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편안했다. 좁은 시야를 들고 제가 택한 것은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 홀로 와서 정착하여 편히 쉬는 것이었다. 아직은 혼자 있기에는 불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제 온 몸을 감싸는 자유로움이라는 것에 의하여 그는 어느새 편안함을 느끼고 이 생활을 느낄 뿐이었다. 한적한 마을, 아무도 저를 모르는 이 곳, 그리고 그 곳에서 어느 순간 그를 잊어버린 자신이 있었다. 저밖에 모르고 있었던, 어리석고 멍청한 새끼. 그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참 얼굴을 쓸어대다 쓰던 논문을 가방에 집어 쳐 넣었다. 이 기분으로는 이론을 증명하기도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게 네 사죄냐. 알베르토 로라스. 완전히 지쳐버린 것은 애석하게도 제 쪽이었다.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가 어느 순간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 속에 집어넣었던 종이들이 무색하게 가방 안에 점점 과거의 물건들을 채워 넣고 있었다. 모르겠다. 그의 생각도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돌아온 곳의 냄새는 역시나 썩 좋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드렉슬러는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거리를 쳐다보았다. 거리는 그가 떠났던 그날처럼 고요하고, 또 차분했다. 그랬던 거리이었겠지. 익숙하지만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을 작은 시야에 담았다.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 발걸음의 끝을 찾았다. 둘이 살았던,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것인지 인적조차도 없었다. 문 앞을 서성거리다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누구 오셨습니까?”
그 순간에는 듣지 않았던 목소리, 단숨에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인식했다. 그의 목소리이었다. 벽을 겨우 잡으면서 제 앞에 서있는 남자는 눈을 감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컥, 드렉슬러는 그 자리를 서있을 수 없었다. 남자는 의아한 듯이 제 앞에 서성이다가 문을 닫았다. 아, 아둔한 녀석. 문에 등을 대고 주르륵 내려앉았다. 아둔한 녀석.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이유로…! 이런 모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힘이 풀린 다리를 겨우 일으켰다. 잘못했다가는 곧 들킬 것 같아 죄를 지은 사람 마냥 황급히 일어섰다. 애석하게도 잘못된 고리의 시작은 자신이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고리.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고리임에 분명했다. 드렉슬러는, 그 것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코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다. 문 앞에 새겨진 것을 외면했다.
[돌아와.]
돌아 갈 수 없어.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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