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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로지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시간이 지나 공개합니다.
1.
눈을 뜨게나, 드렉슬러. 그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썹이 꿈틀거렸다. 긴 꿈을 꾸는 듯했던 남자의 얼굴에 드디어 생기라도 돋아나려 했다. 꽤나 큰 기다림이었다. 태양이 내리 쬐던 시간에서 웅크리는 계절을 몇 번이나 보냈었다. 로라스는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말라버린 얼굴과 몸은 그가 얼마나 지쳤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일어난 남자의 눈에는 혼란스러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알베르토?”
드문드문 들리는 숨소리에 로라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어댔다. 그 목소리에 그제야 모든 것이 풀려버렸다는 듯, 하늘에 대고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내뱉었다. 그의 신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이리 저리 쳐다보는 드렉슬러의 얼굴을 보던 로라스는 그를 살필 새도 없이 바로 간호사를 호출했다. 꽤 오랜 기다림이었다. 드렉슬러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이렇게 길어 질 줄은 몰랐다.
바로 앞에서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쓰러진 드렉슬러의 모습을 잊었다면 거짓말이다. 드렉슬러의 모든 것을 해내었다는 표정, 그 표정에 절망하였다. 너무나도 편안한 그 표정, 그 표정 속에서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을 맛봤다. 무엇보다 편안하고, 어떤 이보다 가장 익숙한 그를 잃는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제 앞에서 눈을 떠준 드렉슬러가 고마울 뿐이었다.
“얼마나 되었지?”
드렉슬러의 격한 숨소리가 내려앉고 익숙했던 목소리 톤으로 로라스에게 물었다. 로라스는 창문을 쳐다보다가 그제야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거의 삼년은 되었네.”
“그렇게나 된 건가.”
드렉슬러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이내 손을 움직이는 몸짓을 보였다. 말랐다. 누워있는 삼년의 시간동안 드렉슬러는 너무나도 약해져있었다. 시간을 잠시 내주었다. 드렉슬러 스스로가 제 몸에 익숙해질 그 시간을 말이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듯, 몇 번 손을 움직이었다가 힘없이 손을 내렸다.
“이겼나?”
“승산이 없었어. 자네의 기지가 아니었더라면 졌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겼군.”
“자네의 생각대로 이겼지.”
“그렇다면 됐다. 당분간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군. 회사는 어떻게 되었냐.”
“뭐, 언제나 늘 그러하네, 조금은 눈을 붙이는 게 어떤가, 아마도 어려울 거야. 몸이 약해졌을 거고.”
“그렇게 해야겠지.”
드렉슬러의 온순한 태도에 당혹스러운 시선이 로라스에게 어렸지만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별 일이로군. 중얼거리다가 의사가 들어오자 자리를 비켰다. 뭔가, 드렉슬러에게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알았던 것이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왜인지 모를 위화감이 로라스의 어깨에 내리 앉은 기분이었다. 로라스는 괜찮겠지. 주문처럼 중얼거리다 의자에 앉았다.
너무나도 긴 기다림이었다. 삼년이라는 시간동안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 일들이었다.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댔다. 이제 괜찮아질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녀석은 나갔나.”
“알베르토 경이요? 방금 나가셨습니다.”
“그럼 됐군. 의사하고 독대하고 싶었다.”
“그렇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억이 영 온전하지 않다.”
“그거 심각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알베르토 경에게는 비밀로…?”
“알면, 복잡해지는 일 아닌가. 그 새끼는 절제를 몰라.”
“증상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십니까.”
“삼년 전의 일에 대해서 완전히 누락된 것 같다.”
드렉슬러는 덤덤하게 입을 열고 대답했다. 혼란스러운 것조차 보이지 않는 덤덤함이었다. 그 덤덤함에 의사는 입을 다물고 증상에 대해서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드렉슬러는 스스로의 기억이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이곳저곳으로 흩날려버린 듯, 드렉슬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반대로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저 녀석, 그리고 쓰러진 그 날의 현장. 그 외에는 전부 누락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러니하군요. 일시적인 일 일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기억하는가, 의사, 내가 어떤 연구를 진행했었는지 말이야. 이 일이 내 연구의 오류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섬뜩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불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의사.”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겠군요.”
의사가 나가고 드렉슬러는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을 천천히 정리해댔다. 그가 눈을 뜨고 나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뜬 순간 그의 친우이자 가장 가까운 알베르토 로라스가 있었다. 그 순간에 잠깐의 안도감이 어렸다. ‘알고 있는’ 사람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눈을 뜬 순간에 ‘인지’ 한 것은 좋았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것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알베르토 로라스. 제 친우이자, 가장 가까운,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었다. 어떤 말을 했었던 것 같았다. 어떠한 행동을 했었던 것 같았다. 머리와 손에 남아있는 체온들은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렉슬러는 그 신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신호를 잡기에는 감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기분이었다.
‘복잡하군.’
눈을 감고 생각하는 생각은 그것들뿐이었다. 다만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은 삼년 전에 했었던 연구의 내용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꽤 중요하게 진행했었던 것 같았던 것 같았다. 기억이 조각조각 파편이 나버려서 그것에 대해서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무언가, 완성한 것을 마셨다는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연구를 마무리 한 후, 그러고 나서 전투를 나갔던 것인가, 머리가 따끔하게 눌러오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꽤 큰 혼동이었다.
드렉슬러는 나른한 하품을 해댔다. 설령 기억이 사라진다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제 연구 탓이라도 지금은 왜 인지 모르게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뛰어나다. 그것으로 충분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뛰어나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두렵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연을 전부 끊은 자신이 무엇이 더 두려우랴. 주변 사람들이 조금 더 문제겠지.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는 이 빌어먹을 침대를 일어나는 일이었다.
제 과거의 기억은 아마도 좋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썩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한숨 자는 것이 어쩌면 더 옳을 수도 있다.
****
지독한 꿈이었다. 드렉슬러는 제 발에 있는 꿈을 끝없이 밟고 달려갔으며, 그 꿈의 끝에는 언제나 죽음만이 남아 있었다. 그 꿈의 끝. 제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드렉슬러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꿈속에서 저는 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숭고하게 입을 맞추고 그 남자의 숨을 꺼지게 만들었다. 생생한 꿈이다. 드렉슬러는 그 남자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그랬지만 알 수가 없는 남자이었다. 이 남자의 이름을 말하자면 말을 할 수 없을 듯 했다.
‘누구지.’
다만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는 그를 매우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뿐이었다. 그를 익숙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누군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뫼비우스의 띠가 돌아가는 것 마냥 드렉슬러의 꿈은 무한히 반복되어가고 있었다. 그 꿈은 지독하게도 드렉슬러의 기분과 생각을 침식해나갔다.
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한 사람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그를 쫓아서 따라가고 달려 나갔다. 달려가는 숨소리가 격하게 뛰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를 찾아가야한다는 사실 만이,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그를 알아야해. 그가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았는지 알아야만해. 라고 그는 말하는 듯 했다. 다시 사라졌다. 눈을 감고 뜨니 다른 세상이었다. 싸구려 향수 냄새를 맡고, 어떤 이를 안고, 어떤 이를 보며 어떤 사람을 추억하고, 어떤 이를 바라보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도무지 누군지 모를 일이다. 어떤 이가 깨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발작하듯 숨을 내뱉었다. 숨을 내뱉어보니 그 꿈을 빠져나왔다는 미칠 것 같은 안도감이 주변을 감싸댔다. 벌벌 떨리는 손을 감출 새도 없이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인식했다.
“알베르토?”
안도가 서린 눈빛, 맞는 답이었다. 그 답에 로라스는 간호사를 불렀다. 알베르토 로라스. 제 친우, 전투를 위해 명예롭게 살기를 바라는 기사, 그리고, 또… 무엇이 더 끼어있던 느낌이었으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확실하게 기억이 부분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전투는 로라스의 입으로 확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다. 왜 이런 오류가 나는 것일까. 삼년 전, 그 시간에 무언가 했던 것 같던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깊숙 거리며 울렁거리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금기된 실험을 택하고 했었더라면? 설마 그런 짓을 하려고 들지는 않았겠지만, 왜 인지 모를 두려움이 드렉슬러의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이 말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기억으로는 무엇 하나할 힘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로라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택했다. 제 기억보다는, 그래도 그의 기억이 조금 더 신뢰성이 있겠다 라고 판단했다. 기억 속의 알베르토 로라스는 어떤 이었던가. 그는 어떤 이었던가. 어떤 모습을 제게 보여주었던가. 어떤 시선으로 제 모습을 바라보았는지, 그 기억의 오류 속에서 결국 로라스의 앞에서 입을 여는 것을 택했다.
“알베르토, 내가 삼년 전에 무슨 연구를 했었지?”
“알 수가 없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러니까, 자넨 꽤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었던 것 같았지. 그것에 대해서는 회사로 가서 정확하게 알아봐야할 것 같네.”
“그것 좀 미안하지만 부탁하게 될 것 같군, 의사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부탁이니 흥분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다. 내 기억이 조금, 성치가 않아.”
드렉슬러의 담담한 말투에 로라스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드렉슬러가 예상한 반응과는 조금 달랐다. 드렉슬러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의 판단 속, 그러니 멈춰버린 삼 년의 시간 속의 로라스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현재의 알베르토 로라스에 대한 이 엇갈리는 괴리감이 드렉슬러의 정신을 조금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원래, 네가 이렇게 차분 했었던가.”
내 기억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아서 말이야. 마른 얼굴을 쓸며 드렉슬러가 중얼거렸다. 드렉슬러의 그 대답에 로라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의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를 하고 다시 되돌아왔다.
“자네가 누워있었던 시간은 꽤 길었지.”
“그런가.”
“그렇지.”
애써 덤덤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드렉슬러는 무엇인가 불안함과 초조함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른다. 로라스는 그런 그를 내려 보고는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의사에게 어느 정도 들었네, 지금껏 자네를 돌봐온 건 나였지.”
“그 의사 입이 굉장히 천박하군. 분명히 네 녀석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었는데 말이지.”
“환자의 말 보다는 의사의 도리에 다한 거라고 생각하게나. 의사에게 부탁했네, 수면제 투여해달라고 했으니 곧 편히 잠들 거야. 그리고 연구에 대해서는, 자네 책상을 조금 건드려야할 것 같은데….”
“아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책상서랍이 아닌, 가방에 들어있을 수도 있겠지. 내가 가고 싶지만, 내 생각엔 네가 내가 병실을 나가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 같으니 부탁한다.”
“알겠네. 더불어서 어서 체력을 회복하길 바라겠네, 자네의 공백은 꽤, 힘든 편이지.”
로라스의 표정에 드렉슬러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로라스의 표정 속에서 무언가를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을 읽질 못할 뿐이었다. 과거, 그러니 삼 년 전에는 그 것이 충분하고 쉽다고 생각했었다.
다리오 드렉슬러 앞에 선 알베르토 로라스의 생각과 표정은 언제나 늘 한결 같았다. 다만, 그 표정이 더 이상은 조금 떠오르지 않을 뿐이었다. 어떤, 표정이었더라. 어떤 생각을 가졌었더라.
‘그걸 설마 모르는 건가.’
낯선 목소리에 드렉슬러는 누워있었던 침대에서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급박하게 일어났다. 귀에서 몽롱하게 들린 나른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설마 하는 듯 여러 주위를 돌아보았지만은 주위에 있는 것은 거울, 그리고 그 속을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다리오 드렉슬러.’
“도대체 무슨….”
오류. 제 폐부를 찌르는 기분이 나쁜 오류가 가슴을 치고 있었다. 무엇인가 가슴 속이 불안감이 빠졌다. 생각을 들기도 전에 간호사가 놓아주는 주사를 맞고 드렉슬러는 천천히 눈을 감아댔다.
무엇인가, 기억이 나질 않은 것, 그 것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찬바람이 가슴을 치고 그만 두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바람이 툭하고 창문을 치고 지나가고 나른하게 몰려오는 것에 눈을 감아댔다. 알베르토가 돌아오면 알지 않을까. 드렉슬러는 그제야 편안히 눈을 감았다. 꿈틀거리는 새끼 손가락을 둔 채로.
****
“드렉슬러!”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온 몸을 짓누르는 힘에 이상함을 느껴댔다. 심각하게 긴장한 몸, 너무 심각하게 떨리고 있는 몸의 떨림에 이상함을 느껴댔다. 숨을 몰아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제야 긴장하고 경직되었던 몸이 멈추었고 힘겹게 제 위를 누르고 있는 이를 인식해댔다.
“알베르토?”
눈을 찡그리면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로라스는 안도한 눈빛이었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 오묘하게 돌기 시작했다. 드렉슬러는 눈을 돌려 주변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제 주변이 이상하게도 깨끗했다. 너무나도 깨끗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이들의 시선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모르고 있는 일이 일어난 것 마냥 주위의 시선은 눈과 피부로 찔려댔다. 이 시선을 언제 받았었더라. 그래. 뭣도 모르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을 때, 그 때와 비슷한 시선인 듯 했다. 드렉슬러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
“…”
“알베르토.”
채근 하려는 듯 드렉슬러가 로라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행동이지? 드렉슬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로라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를 뿐이었다.
“별 거 아닐세, 늘 있었던 일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네.”
“늘?”
“그래. 삼년 동안 빠짐없이 늘.”
그 긴장감에 드렉슬러는 한숨을 쉬어댔다. 도저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한숨을 쉬어대자 로라스는 침묵을 고했다.
“자네가 했다는 연구 자료를 가지고 왔었네. 그 사이에 발작할 줄은 몰랐지만 말일세.”
“아, 미안하게 됐다. 삼년 동안 빠짐없이 늘, 그랬다는 사실이 꽤나 충격이 강했군, 어디에 있었던 서류인가.”
서류를 내미는 손에 드렉슬러는 표정이 천천히 굳어댔다.
“자네 말대로 가방 안에 있었던 서류인데, 다만 문제가 있다면 몇 장은 이미 타서 볼 수 없었고 그나마 남은 서류들일세, 어떤 연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자네는 그 연구에 꽤나 몰두했었네. 그 것이 인류를 구할 생각이라는 그런 헛소리를 덧붙이면서 말이지.”
“알 수 가 없군, 인류를 구한다는 헛소리 같은 소릴 하고 있고 말이다.”
“글쎄, 알 수가 없어서 말이네.”
“알았다. 어쨌든, 고맙다. 알베르토.”
“드렉슬러.”
나직하게 묻는 소리에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 라고 묻는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표정을 보고 대답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 표정을, 삼년 전에도 봤었던 것 같았다. 중요한 말을 했었던 순간 말이다.
“아닐세,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는 그것을 그만 두었으면 좋겠네. 이것뿐일세.”
“이제 와서? 무엇을 그만 두라는 거냐.”
“곧, 알게 될 것 같네, 아직까지 나는 그것에 대해서 입을 열기에는 그것이 두렵기 때문일세. 자네를 집어 삼켰던 ‘그것’을.”
“알베르토.”
“이만 가보겠네, 부디, 드렉슬러 편하게 잠들길 바라네.”
드렉슬러는 굳은 표정으로 로라스가 나가는 모습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제 손에 쥐어진 종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였다.
왜 로라스가 그러한 눈을 쳐다보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있었는지 천천히 조각들이 짜 맞추어 지기 시작했다. 드렉슬러는 한숨을 쉬어댔다. 금세 차가워진 공기가 폐부를 시리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짐작이 되었다. 캄캄하고 차가운 주위가 다른 눈을 뜨게 만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다른 눈동자는 생각 외로, 제 생각과는 다른 눈이었을 지도 모른다. 눈동자의 집요한 시선을 뒤로 넘기고, 애써 외면한다. 드렉슬러는, 제 자신이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고 있었다. 벌벌 떨리는 손, 천천히 감기는 눈이 그의 불안을 담았다.
2.
인간은 본디 선한가, 혹은 악한가. 인간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가. 이 불필요한 전쟁은 언제까지 목을 조르며 흔들리는 이를 붙들고 살아가라고 대답하고 있는가. 어쩌면 이 모든 것에 지쳤을 지도 모른다. 이 걸음에 대해서, 이것에 대해서 지쳤을 지도 모른다. 이미 한 차례 실패임을 증명한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도전하고 싶었을 아둔한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과거의 자신은 무엇을 믿고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구 떨어지는 플라스크와 주사기. 그 사이의 실패, 그 실패 속에서 마지막으로 도전한 미련한 실험은 손목 위로 올라온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만한 생각이었다. 다른 모습을 분리하는 것, 선천적인 악함의 제거. 그 것을 원했다. 가슴 속에 영원히 감춰두었던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어.’
‘내가 왜?’
‘나는 틀리지 않았어.’
혐오와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아 주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꽁꽁 숨겨서 벽을 세워야지. 아무도 안으로 들리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을 어떻게 하려 했던가. 그래. 감히 죽이려 들었다.
‘이제야 눈치 챈 거야?’
어린 모습의 자신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너무 늦었어.’
‘알아.’
‘이제 인정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아니야? 다리오.’
‘그 이름으로 감히 날 부르지 마.’
그의 눈빛이 제법 매섭게 굵어졌다. 그 모습에 그 소년은 미소 지을 뿐이다.
‘감히 날 떠나려고 했어. 네 주제에’
‘잊었냐, 너와 나는 함께할 수 없어.’
드렉슬러는 고개를 숙였다. 변하는 것은 없다. 그는 불가역성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이다. 드렉슬러는 제 얼굴에 닿는 작은 소년을 외면했다. 눈을 다시 감았다. 그는 외면해야함을 안다.
‘미안해.’
눈을 뜬 드렉슬러는 숨이 막힐 만큼 조이는 느낌에 눈을 다시 뜰 수 있었다. 이제야 퍼즐이 조금씩 맞춰 그림이 보여 지었다. 멍청한 과거의 드렉슬러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되어 눈을 찡그리며 흘리는 땀을 마른 손으로 닦아 냈다. 인간은 본디, 악하다. 악함을 감히 과학의 힘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렉슬러 본인이 분리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자아. 그 자아의 발현을 깨닫고 스스로 무엇을 했었던 것인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불꽃이 치솟는 곳으로 발을 내딛지 않았던가. ‘그’가 나타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제 내면 중 가장 악한이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채, 끝임 없이 속삭이는 악마. 순수 악의 남자이었다.
어리석었다. 너무도 어리석은 행위이었다. 드렉슬러는 겨우 침대 위에서 일어섰다. 또 다른 자신과 싸웠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마냥, 바닥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 찼다. 난동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닥에 닿는 작은 발걸음에 유리조각이 밟혀 아릿하게 아파져온다. 유리, 유리가 그렇게 아파올 줄은 몰랐다. 아주 작은, 호기심을 품은 것 마냥, 그 것은 그렇게 다가와 버렸다.
‘미련하긴.’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거린다. 미스터리한 사실, 그것을 아는 것은 아무도 없길 빌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도 몰라야만 했다. 다른 자아가 침식하는 순간, 본인의 모습은 어느 순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네 몸은 내 거야. 어디를 도망가려고?’
지옥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온 몸에 땀이 가득 차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빼앗길 듯 했다. 이게 무엇이라고. 축축한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드렉슬러?”
눈앞에 들리는 목소리에 드렉슬러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익숙한 남자의 모습에 안도를 하는 것 마냥 한숨을 쉬어댔다.
“알베르토.”
“이리 돌아다녀도 괜찮은 것인가.”
그리 말하며 드렉슬러의 상태를 살피는 로라스였다. 바닥의 핏자국과 심하게 땀을 흘린 모습. 무엇인가 불안감에 흔들리는 드렉슬러의 시야를 확인해댔다. 극심한 불안이었다. 흔들리는 눈빛에 그것을 찾은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어깨를 잡았다. 긴장감, 무엇을 보고 놀라는 것인이 알 수 없는 그의 긴장감이 로라스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전혀.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가, 그렇다면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떤가. 발은 왜 그렇다 다쳤는지 모르겠군.”
“별 거 아니다. 유리를 밟았을 뿐.”
“그것뿐인가?”
집요하게 물어 늘어지는 로라스의 태도에 드렉슬러는 지쳤다는 듯 굴었다. 그만 말해도 될 것 같다. 라고 대답하며 로라스를 겨우 안심시켰다. 로라스의 표정이 의미심장하여 어쩌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침대로 다시 앉으며 로라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하겠지.”
“별일은.”
“이렇게 말하는 꼴을 보니, 무언가 실수한 게 분명하군.”
“…뭘 그렇게 확신하나?”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봐왔으니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코트를 벗어두며 서있던 그가 무릎을 굽혀 발을 보기 시작했다. 유리 파편이 깊숙하게 박혔군. 중얼거리며 발바닥을 보고 있었다.
“상처가 깊겠어. 간호사를 부르는 것이 좋겠네.”
중얼거리는 그를 빤히 지켜본다는 것을 들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아는 것처럼 구는 로라스의 태도에 드렉슬러는 의뭉스러웠다. 한숨을 쉬어댈 뿐이었다.
“그렇게 하겠다.”
한숨을 쉬며 드렉슬러는 포기한 듯 대답했다. 발을 조심히 매만져대는 손길이 우악스럽게 발목을 쥐어댔다.
“혹여나 묻겠네. 설마 삼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건가. 드렉슬러?”
“…내가 네게 말했던가.”
“회피하지 말고 말하게나.”
발목에 손자국이 남았다. 드렉슬러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로라스의 표정을 보며 대답하였다. 역시 피곤한 녀석이 따로 없었다.
“그래. 드디어 기억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이 변하지? 무엇이 변하겠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드렉슬러.”
단호한 로라스의 목소리가 귀 끝에 닿았다. 그 목소리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 연구는 실패야.”
한숨소리, 짙은 한숨소리에 포기한 남자의 초상화까지 그려지는 듯하였다. 드렉슬러의 모습에 로라스는 덤덤히 몸을 일으켜 대답할 뿐이었다.
“그날의 괴리감은 역시 그것일 줄 알았네. 그래서 자네의 말에 이리도 덤덤할 지도 모르겠지.”
“괴리감?”
“그래, 그 날의 자네는 다른 사람처럼 굴기에…, 그 결과가 이 것일 줄은 몰랐네.”
“그 날 네가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대답해봐.”
“그 날, 불러도 자네는 대답하지 않았네, 다른 사람이 걷는 것 마냥 보폭마저도 달랐지. 머리를 맞아 시야를 확실치 못하게 잡은 순간에도 자네는 뭐에 홀린 듯 굴었더군. 오히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고, 기괴한 것이었지. 사람이라고 칭하기에 이상했네, ‘그것은’. 자네 스스로가 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했었네. 참고로 말하지만은, 내 기억에 오차는 없네. 그러니 대답해주게나, 자네가 한 연구의 정체를.”
단호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가 말하는 괴리감은 내 연구와 관련되어있다. 네게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연구의 내용은 인간의 선함과 악함을 분리하는 연구이었다. 그 연구의 피 실험자는 나였지.”
대답한 목소리에 로라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예상한 일이었다.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그것’을 보고 설마 했지만, 어찌 인간이 신의 일에 도전하려고 했는가. 드렉슬러! 절대 그 일은 불가능할 뿐 더러 인간의 도리를 꺾는 것과 마찬가지 일세!”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워 바라볼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회피했다. 옷깃을 끌어당기며 화를 내는 로라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전쟁을 그만 두고 싶었다. 더 이상은 그 자리에 서있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건 모순일세. 드렉슬러. 끝내길 바랐다고? 그렇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스스로를 갉아 먹는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했네. 그렇지 않나. 자네는, 그러지 말았어야했어. 그 결과를 봐. 신을 거역하고 모욕한 죄를 치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네.”
“신을 모욕했다고? 개소리나 다름없군. 신, 그래,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 새 삶을 주었나, 아니면 더 이상 신경조차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을 주었나? 네가 그렇게 말하고 말하는 신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았어. 모르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냐고 네게 묻고 있다. 알베르토 로라스.”
“드렉슬러.”
“부르지 마.”
조심히 미간을 눌러오는 손길에 드렉슬러는 눈을 감아댔다. 작은 한숨소리, 그 소리에 드렉슬러는 눈을 떴다. 로라스는 오롯하게 드렉슬러를 담고 있었다. 묵묵히 바라보는 그 소리, 신뢰와 어쩔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것들이 드렉슬러를 생각하게 하였다.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말하게나. 우선은, 회사 사람들에게는 함구하겠네.”
억누르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알고 있는 드렉슬러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분명, 화를 내고 싶을 것이다. 의논하지 않고 제멋대로 판단해버리고, 그 후에 일어난 것은 일에 대한 오류가 아닌가.
“우선은, 발부터 간호사에게 보이는 게 좋겠군. 그렇게 한다면 좋겠어.”
“알겠다.”
화를 억누르는 로라스의 말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
그 날 알베르토 로라스가 본 것은 드렉슬러의 탈을 쓴 무언가 이었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그것에 대해서 함구했지만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하나 밖에 없는 친우이자, 무엇보다 소중한 이었기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하나의 욕구와, 그 곳으로 들어가려는 다른 욕구의 충돌은 기괴할 정도로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드렉슬러?”
드렉슬러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은, 로라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드렉슬러의 것이 아니었다. 기묘한 거리감과 불쾌한 것이었다. 이 괴리감이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선명하게 욕구에 파고드는 것은 그것은 다리오 드렉슬러라고 하기엔, 아니었다. 탁한 눈빛 속에서 발견한 것은, 이상적인 욕구인가, 아니면 지독히 현실적인 욕구인가.
몽롱한 눈빛에 빠진 친우는 지독하고 잔인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불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믿는 눈빛으로.
그 눈빛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던 모습은, 무엇이었던가. 움직이는 입모양을 잊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숨을 더 이상 쉬지 않으며 의식을 잃은 친우의 모습이었다. 로라스는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 것은 잊어서는 안 될 모습이었다.
****
발바닥에 결국 꼴사납게 붕대를 둘렀다. 발끝에 아직까지 유리 파편이 남은 감촉이 들었다. 발끝을 오므리고 발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무료하게 누워 머리를 베개에 파묻어댔다. 그것이 지극하게 정상적이며, 하는 것이 옳았다. 수면제를 또 다시 늘린 건가, 조용하게 오는 졸음에 눈을 꾸벅거렸다. 꾸벅거리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숨을 쉬는 시간 동안에 그는 무엇을 짐작이라도 한 사람인 것 마냥 굴었다.
다른 이가 눈을 뜨기 전까지
눈을 뜬 ‘그’ 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댔다. 숨을 쉬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편해져왔다. ‘그’는 주위를 살피어댔다. 깔끔한 주위에 흡족이라도 한 것 마냥 웃어댔다. 통통, 뛰는 소리, 이 소리까지 완벽하게 마음에 들었다. 손목에 꼽혀져 있는 바늘을 뽑아내고 축축하게 흐르는 액을 밀어 떨어트렸다.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꽤 컸다. 부서지는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드렉슬러, 자네가 부탁…한 것을 가져왔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을 해댔다. 그 모습은 어디서 본 듯했다.
“고리타분한 신사가 왔군.”
발을 바닥에 딛자 덜 아무른 흉터 자리에 핏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로 선 모습, 그리고 무언가 다른 태도, 로라스는 그가 본능적으로 ‘그것’ 임을 인지했다.
“드렉슬러는 어디에 있지?”
덤덤하게 서류를 내려놓으며 로라스가 물었다. 아아, 그 말인가, 별 일 아니라는 듯 그가 대답했다.
“그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방황하고 있어. 너와의 또 다른 미로 속에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아마도 미로의 끝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눈을 뜨지 못할 것이란 대답이다. 이 몸을 가지고 방황할 것이다. 네가 막는다면 너 조차도 뚫고 지나갈 것이다.”
단호한 목소리, 로라스는 차분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너를 막는다면?”
“막을 이유는 없을 텐데, 나는 네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고 치기엔 너는 내가 알던 그가 아니로군, 그렇다면, 더 이상 자비를 내려줄 필요도 없겠지. 그를 살린 것도 나였고, 바라본 것도 나였으니 거두는 것 까지 나여야겠지.”
“로맨틱한…기사 나셨군,”
조금도 로맨틱하지 않은 우악스러운 손이 ‘그’의 목에 걸렸다. 체중을 전부 쏟자 그는 컥 하는 숨소리를 내며 흐려진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하나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인격, 다른 것이었다.
“이, 렇게 해서 그가 돌아올 것…같나, 그는 돌아오지 않아, 기억의 미로를 탈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크윽, 없지.”
“몰랐나보군, 드렉슬러는 이 일을 충분히 예견했다.”
“그게, 무슨.”
“그 일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 군. 조용히 입을 다물게나.”
끄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로라스의 손에서 조용히 숨을 내려두고 있었다. 꺽, 거리는 소리는 꽤나 크게 그 고요한 자리를 채워댔다.
“대, 대단한 흐, 친우를 뒀, 커억.”
“쉬이, 그러니 입을 조용히 다물고 눈을 감게나.”
탁한 눈빛 속에서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아댔다. 혼탁한 눈빛이 아닌 그 것의 눈빛에 로라스는 덤덤하게 서 있으려 노력했다. 숨을 더 이상 쉬지 않는 제 친구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왼쪽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통통, 더 이상 뛰지 않는 고동 소리가 가슴 아프게 했다.
아아, 제 하나 뿐인 사람은 이리도 가혹한 일을 제게 시켜버렸다. 평온하게 눈을 감은 그 얼굴위에 찬찬히 입을 맞추었다. 다른 인격을 죽여 버리고 남은 것은 하나의 몸이었다. 이 남자의 마지막 부탁은 너무도 잔인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했던 말은 그 것은―.
‘나를 죽여. 로라스.’
그 한 마디었다. 그 입 모양을 외면을 할 수 없었다. 깨달았던 그의 손바닥을 조심히 잡아댔다. 영원한 꿈을 꾸길 바랐다. 깨어난 현실에 부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결국은 확신이 되어버렸다. 영원한 꿈속을 헤매길 바란 것은 제 욕심이었다.
눈을 뜬 드렉슬러는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래, 분명 삼년 전의 드렉슬러이었다. 그러나 연구를 보며 말을 해대는 드렉슬러는 다른 드렉슬러이었다. 마치, 철없던 그 순간의 드렉슬러를 보는 듯 했다. 그 괴리감. 그 날의 괴리감과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미 제가 알고 있었던 드렉슬러는 집어 삼켜 없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 괴리감, 그 작은 괴리감에 의하여 결국 제 사람을 제 손으로 죽여 버렸다. 멍청하게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보아도 이미 죽어버린 그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너무나도 잔인한 처사였다. 그 남자는 그렇게 부탁하였다. 이미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
그 남자는 조용하고 고요했다. 목에 남은 자국을 옷깃으로 가려댔다. 그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듯 고개 짓을 하고 몸을 돌렸다. 시선이 모두 제게 박히는 듯했지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그 앞에 그녀가 다가왔다.
“알베르토 경.”
“조노비치 양.”
짧은 머리의 그녀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부탁이었네.”
그 짧은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의 부탁이었지. 타라는 그 대답에 의아한 듯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가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옳겠지. 그리 수긍하면서. 그는 거짓말을 고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연구에 대해서는 고하지 않을 겁니까?”
“그렇네, 그것이 그의 명예를 지키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네.”
고리 타분한 남자의 대답에 타라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다. 어떠한 시선이 오는 줄도 알면서도 그는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해서였어.”
덤덤한 그의 대답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리오 드렉슬러의 상태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 또한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처연한 남자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왔다. 그가 없는 이 도시는 차갑고, 숨조차 얼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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