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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즈

릭벨져 - 월광소나타

한여리 2017. 1. 9. 15:41

17.1.9 등록

31일 삭제  

 

 

손목의 시계는 각기 다른 장소의 시간을 가리키며

분주히 움직이지만, 정작 내가 머무르길 원하는 곳은

시간이 멈춰져 있는 공간이다.

 

 

 

 

 

 

1

 

 

 

“사랑하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숨을 거둬가는 순간까지 그리 대답했다. 그 남자 릭의 눈빛은 진중하고 무거운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따라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는 가까워질 듯 했다. 릭은 그에게 있어서 넓디넓은 우주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눈빛과 말투는 모두 우주를 걷는 듯 가슴을 가볍고도 무중력에 빠진 듯 걸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남은 것이 무엇인가.

릭이 쓰러진 자리에서 수 없이 많은 물들이 흐트러지며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알면서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의 복부에 박힌 것이 제 칼이라 그런가. 알 수 없었다. 손에 무게가 잡힌다. 칼을 잡은 나의 손, 그리고 점차 눌러오는 릭의 무게. 그의 무게가 천천히 기울었다. 꽉 쥔 손잡이를 놓았다.

“릭, 그래. 릭. 나의 릭.”

너를 찌른 것이 나였더냐.

“이건 꿈이길 바라오.”

“그래, 이건 악몽이야.”

지독한 악몽. 멀어지는 손길과 눈동자에 입을 맞추었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악몽이야.

 

 

 

◈ ◈ ◈

 

 

“이런, 이런 결과를 낼 줄은 몰랐습니다만, 즐겁습니다.”

“미천하긴.”

벨져는 찻잔을 들었다. 찻잔의 붉은 차가 시선을 잠시 머물게 했다. 그 머문 시선을 따라 스푼을 들어 차를 휘저었다. 앞의 남자의 눈빛이 조금씩 굳어져가는 것을 보고는 웃었다.

“목적이 무엇인가. 그대. 어디 한번 이야기를 들어볼까 하네만.”

오만하게 묻는다. 그리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스푼을 들어 보니 역시 변색되어있다. 경계심을 풀지 않는 태도에 눈빛이 흐릿하다.

“역시, 그런 태도를 예측했습니다. 홀든 경. 당신이 바라는 대로 그 사람의 누명은 벗겨질 겁니다. 다만… 당신을 버린다면.”

“그게 무슨…!”

온 몸이 마비된 것 마냥 굳어졌다. 벨져는 그제야 주위를 살펴보았다. 얌전히 태워져있는 초. 저 초가 문제였던가. 지독하고 자욱하게 퍼지는 냄새, 마비향인가. 고전적인 느낌이다. 벨져는 한숨을 쉬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목적이 뭔가. 그것이 있을 테니, 이리 구는 게 아닌가.”

“그 머리, 그 눈동자. 당신의 모든 것을 바랍니다.”

“천하군.”

눈빛조차 거두며 그를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발 끝 부터 천천히 굳어가는 제 몸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에 발린 말이야 뻔하지. 그런 버러지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조금씩 떨리는 손을 잡고 칼을 뽑아 허벅지에 찔렀다. 비릿하게 피 냄새가 퍼지며 바닥에 피가 조금씩 떨어졌다.

“그러면 내가 묻겠다. 천한 말은 어디까지 들어주어야하는가? 그대.”

핏기가 가신 얼굴을 보며 칼을 집어댈 뿐이었다.

“저런, 테이블이 더러워지겠군. 어머니가 가장 아끼던 것이었는데 말이지.”

 

 

◈ ◈ ◈

 

 

조금은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홀든가에 내려진 전체 명령이었다. 묵묵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벨져, 그의 형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 옳음에 대해서는 별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벨져 홀든이 안타리우스에게 납치를 당할 뻔 했다. 라는 소식은 꽤나 컸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그가 조금은 귀찮을 뿐이었다.

“그러니, 함께 가자했을 때 갔더라면 얼마나 좋소?”

자유로운 사람. 릭 톰슨이었다. 릭의 잔소리 아닌 목소리에 벨져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갈 뻔 했다. 릭의 말투, 머리부터 발끝까지 걱정이 어린 목소리, 그 것이 벨져 자신도 헷갈리게 할 만큼 좋은 말투이었다.

“지금 웃는 거요?”

“아니다.”

“거짓말하긴. 당신을 얼마나 봐왔는데.”

“아니래도.”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뭐, 좋은 거라도 있소? 거참. 당신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군.”

어느새 자리 한 켠 을 차지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 벨져는 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이무스 또한 그가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다. 어떤 이인지는 궁금하지 않았을 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묻지 않는 걸 본다면 다이무스가 이미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의 관계를 들켜버릴까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다이무스의 눈빛이라면 모두 밝혔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벨져는 작은 테이블 위에 차를 올려두었다. 아, 물론 릭은 마시질 않을 것 같았다.

“그거 또 홍차로군.”

“커피보단 괜찮지.”

“난 가끔씩 당신이 그럴 때마다 귀족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곤 하오. 같이 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글쎄, 내가 그대에게 많이 익숙해졌나보군.”

단조로운 어투, 그리고 그 속에 번지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기에 가만히 두었다. 찻잔이 엎어진 것조차도 모른다. 그 말이 무엇이랴, 나누는 말이 무엇이랴. 그 말은 큰 우주를 움직이게 한다.

“정말이오?”

흔들린 찻잔은 이미 흥건하게 테이블 위를 번지게 하였다. 번진 향이 자욱하게 코끝에 남는다. 큰, 우주. 그래. 릭은 그런 존재다. 큰 우주. 그 큰 우주를 바라본다.

“그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옳다. 옳았다. 그 시선에 옳음을 느끼고 손을 잡고 피하지 않는다. 포근한 거리에 서있는 것 마냥. 그런 관계인 것 같았다. 나른한, 이 보통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 이것이 우주와의 관계다.

어쩔 수 없으면서도 이끌리는.

 

 

◈ ◈ ◈

 

 

“언제까지 곁에 둘 거냐.”

캄캄한 침묵 속에서 한 말은 그 말이었다. 그의 형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묵묵히 찻잔을 내려두었다. 글쎄. 라고 대답하자마자 눈빛이 조금은 좋지 않았다. 날카로운 침묵.

“내가 네게 이래라 저러라 할 입장은 아니겠지만, 벨져. 지금 같은 상황에는 곁에 두는 것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온 몸이 울리는 것 마냥 생각이 깊어져버렸다. 답답해져버리는 가슴팍을 꾹 눌러댔다. 안다. 어떤 문제인건지, 어떤 걱정으로 말을 해주는 것인지 전부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이리도 갑갑할 테지. 강요를 바라는 얼굴에 결국은 고갤 끄덕이고 만다. 저 눈빛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걱정의 눈빛이었다. 그의 형은 이미, 온 몸이 얼어붙은 그의 모습을 기억하듯이 걱정하는 얼굴과 표정이었다. 안다. 알고 있기에 이리도 차갑게 대할 수 없을 문제인 것이다. 결국은 식어버린 차를 결국 내려 본 것이 끝이었다.

“벨져, 나는.”

“알기에, 아무 소리도 안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벨져.”

걱정 어린 목소리를 결국 닫아버린다. 안다. 이런 분위기. 이런 느낌들. 그러니 모든 것들을 단절해버리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시간, 공간을 바라기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대의를 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텁텁하고, 고리타분한 장소를 벗어나야만 했다.

“크리스티네의 편지가 와있더구나.”

한숨을 쉬며 내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내민 편지를 손에 쥐었다. 편지 뒤편에 유려하게 적힌 글씨가 명백히 그녀의 편지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조심스럽게 답답한 가슴팍에 집어넣었다. 그만 나가보라는 한숨 어린 목소리에 문을 닫고 나설 뿐이었다.

그녀가 왜 편지를 남겼는지는 얼추 지레 짐작이 되려는 부분이었다. 아마도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조심히 그녀의 편지를 지칼로 조심히 뜯어댔다. 사각 스치는 소리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즐거운 소식일 듯, 기분을 조금은 설레게 만들었다. 그녀의 편지는 가벼운 인사로 시작되었다. 크리스티네, 가여운 아이. 가여운 소녀. 그녀에게 일어난 비극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신의는 모두의 신의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옳습니다. 벨져 홀든 경. 그대의 말이 옳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의심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벨져 홀든 경…’

 

“그게 무엇이오? 혹여 연애편지라도 받는 것이오?”

“연서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내용이 딱딱하지 않은가.”

“하긴, 당신이 연서를 볼 이유도 없겠지만.”

릭의 목소리. 릭은 어디서나 그를 보고 있는 것이 뻔했다. 벨져는 한숨을 쉬며 그 목소리를 밀어내었다.

“그만 두게.”

“무엇을?”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손을 뻗으면 닿을, 미지의 공간에 손을 뻗어 그 공간 속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잡히는 것은 그의 손이었다. 그 손을 잡으면, 어쩌면 미지의 세계에 이끌릴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그런 미지의 세계.

“들켰소?”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는, 어느새 실체가 되어버린다. 잡고, 흔든다. 이는 그렇다. 릭이라는 남자는 벨져 홀든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 벨져는 입술을 꾹 깨물어댔다. 안다.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대, 나를 떠날 수는 없는 건가.”

“벨져?”

잡은 손의 힘이 풀려지는 것이 점차 느껴진다. 릭의 손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느껴지려 했다. 사라지지마. 손을 놓지 마.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밀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 할 일은 많았다. 대의. 벨져 홀든이 이루고자 하는 일들은 모두 대의인 것이다. 크리스티네의 편지를 손에 꼭 쥐었다.

“이리도 모질게 그대를 밀어낼 수밖에 없어. 알아. 이것이 무척이나 제멋대로인 것을. 그러나 릭. 그대를 밀어내지 않으면….”

“알겠소. 오롯이 당신 뜻이라면. 그래야겠지.”

“릭.”

조용히 그의 이름을 담는다. 손에 잡히던 것들이 어느새 잡히지 않고 바스러져버린다. 넓고, 그리고 포근했던 그의 것은 천천히 닫혀버린다. 이끌림은 어느 순간에 서로를 향해있질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라고 스스로가 변명을 해보았다. 릭, 그에게 위험한 것을 덤덤히 내줄 만큼, 제멋대로가 아니란 것이다. 그의 형이 충고 하듯, 지켜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컸던, 지켜내지 못했던 과거의 추한 기억들이 목을 조르고, 헷갈리게 만들어버린다.

‘벨져.’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는, 추억의 목소리의 기억은 어느 순간 가슴을 잘라내는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나의 조각을, 손에 쥐고 싶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조각은 손에 쥐어지질 않고 오히려 벗어나려 한다. 그러니, 놓아야겠지. 그 다짐을 해버린다. 온 몸은 그것을 부정하는 듯 했지만 말이다. 애써, 잡히지 않는 사라진 작은 그 공간을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언덕 사이로.

‘그렇지만 벨져 홀든 경, 재고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오히려, 그대의 명예를 실추 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주십시오.’

‘애정을 담아, 크리스티네가.’

 

크리스티네의 편지를 바라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유려한 그녀의 글씨가 번져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답변이 가슴팍을 찔러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의 온기를 느낄 수가 없어 가슴팍이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미련한 방도였던가. 실수였던가. 모를 일이다.

아쉬움에, 모든 것을 닫아버린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열린 마음에 다시 작은 빛이 온 몸에 스며들까 두려운 마음이 솟아날까, 그럴까봐 닫아버린다. 처음, 그를 만나지 않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버린다. 그것이 옳다.

 

 

◈ ◈ ◈

 

 

크리스티네의 편지에 답신을 해야만 했다. 그녀의 대답은 오롯이 거절을 담고 있었다. 거절, 그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왜, 너는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이냐, 묻고 싶었다. 그녀의 대답은 뻔했다. 이것은 가려야할 만한 옥의 티라고. 알면 알수록, 벗기면 벗길수록 추하게 드러나는 프리츠의 지독한 운명이라 굳건하게 대답하였다.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벨져 홀든 경. 우리는 이 운명을 가지고 걸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숙연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무엇이라 대답하랴.

“그 운명을 들고 변화하지 않을 것이냐?”

“예, 그것이, 옳습니다. 경, 우리는 이 연결 고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의무이자, 대가입니다.”

“크리스티네.”

“그러니 더는 이리 요청하지 마십시오. 홀든 경. 안타리우스와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요?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저항한 프리츠에 대한 보복입니다. 그 보복에 굴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설령 한다고 헌들, 변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미,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손가락질 합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입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수밖에요.”

“크리스티네!”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웃던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알 수 없을 것들이 담겨있었다. 그 눈빛은 벨져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 비춰보였다. 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 또한 그를 닮았다.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내 선택에 말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선택할 겁니다. 경. 경이 말한 것처럼 나 또한 결백을 추구 합니다. 다만, 경, 우리는 아직 숨을 죽이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냐. 크리스티네. 아둔하게 시야가 어두워진 것이냐, 아니면 네 표정에 어린 공포인 것이냐.”

“경.”

“아직도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냐.”

“경!”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모두가 기억한다.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말이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어보았자 서로에게 피해가 될 지도 모른다.

“나가보아라. 크리스티네. 그리고 네가 그렇다면, 나 혼자라도 이 일을 진행할 것이다.”

“다이무스 홀든 경에게 알릴 겁니다.”

“그래도 좋다. 그래도 그는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꾹 다문 입술, 그 입술 속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날아온 편지는, 명백하게 그러지 말라는 그녀의 단호한 충고가 담아있었다. 편지에 문장을 담았다.

‘그러나 크리스티네, 네게 그 분이 소중하듯, 나 또한 그러하다.’

‘네가 막을 이유는 없다. 나는 문을 닫을 것이다.’

‘마음을 담아 벨져.’

 

“나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일 터일 텐데. 애석하게도 그를 놓아버렸군.”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함이었다. 모질게 밀어내어도 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 일에는 그와는 관계가 없었다. 분명 그가 들었더라면 함께 하자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와는 관계가 없는 오롯이 벨져, 그의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를 놓았다. 안다는 것은 매우, 힘겹게 만든다.

편지를 밀봉하고 답신을 보낸다.

한동안 입지 않았던 허름한 로브를 온 몸에 전부 담았다. 날이 뾰족하게 선 칼의 날을 보고 칼집에 집어넣는다. 처음과 똑같을 뿐이다. 다만, 처음과는 다를 뿐이다.

 

 

◈ ◈ ◈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의 소음, 쉴 세 없이 움직이는 타자기의 소리, 그리고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 벨소리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어이, 릭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아, 뭐. 글쎄.”

“저번에 어디 다녀오고 나서 그 모양인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던 것 아니겠지?”

“아, 뭐.”

“똑바로 대답해.”

“뭐, 그런 편이지. 꽤 타격을 입었거든.”

“재미없긴.”

릭은 몽롱하게 주위를 볼 뿐이었다. 아, 보고 싶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았던 사람이었다. 어떤 태도를 보이건, 어떤 말을 하건, 오로지 그라는 이유 하나로 좋았던 것이다. 사랑, 그래 어쩌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서로의 감정이 감히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머뭇거리면서 보였던 조금의 설렘, 그 설렘을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깊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입술 끝에 닿았던 얇았던 머리카락, 그리고 곧은 시선, 그 시선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리도 모질게 그대를 밀어낼 수밖에 없어. 알아. 이것이 무척이나 제멋대로인 것을. 그러나 릭. 그대를 밀어내지 않으면….’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본다면, 분명,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들처럼, 무엇인가 불안이 떠오른다. 아마도 또 다시 불안한 길을 걷는 것이겠지. 그에게는 좋은 길들 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좋은 길, 좋은 것들. 그러고 싶었다. 눈동자 속에 깊이 박힌 외로움의 조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것은 오만이었나? 깊게 한숨이 쉬어질 뿐이었다.

위험하고, 외로운 길을 또 다시 걷는 것 이겠군. 그는 그렇게 다시 혼자 걷는 길을 찾아 헤매겠지.

“담배가 전부 타버렸어.”

“아, 그렇군.”

“정신을 도대체 어디에 두는 것인지. 곧 마감이니 돌아가자고.”

“그래야지.”

잊을 것 같은 현실을 잠시 잡는다. 그는 괜찮을까. 아마 괜찮을 것이다. 언제나 늘, 그래왔던 척 굴었으니까.

“아, 참. 릭. 아까 말한다는 게 잊었다. 네 일 다시 하라는 지시야. 전부 오타 났다고 하더라. 정신 똑바로 차려.”

“저런.”

진심으로 탄식했다. 어떻게 그걸 다시 하라고 그래. 머리를 마구 헤집어댔다. 다시 하려니 눈 앞이 아득했다. 잠시, 일을 끝내고 몰래, 그 뒤를 밟아볼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욕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들키지 않는다면, 몰래. 숨바꼭질을 하는 것 마냥 몰래 지켜보는 것은 안 되는 것일까. 까득 손톱을 물어댔다.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밀어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날의 그의 손은 심각하게 떨고 있었다. 겁을 먹은 아이 마냥,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 공간 속에서의 손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걸린다. 그래서, 이리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릭!”

“알겠소! 재촉 좀 그만 하시오!”

별 수 없었다. 지금은 일을 해야겠지. 한숨을 쉬며 타자기를 다시 놀린다. 홀든. 벨져 홀든,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혹여 위험한 짓은 하고 있지 않겠지. 지금은 이렇게 편지로 마음을 쓰지만은, 언제나 보고 싶소. 늘. 만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그리고…. 아니오. 어느새 일이 아닌 연서 아닌 연서를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쥐고 있었던 편지. 무엇인가 익숙한 문장이 찍혀 있었다.

“프리츠.”

그가 그렇게도 생각하는 프리츠 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벨져. 또 다시, 그러지는 않겠지. 또 다시. 그를 보며 화를 내지는 않겠지. 쿵, 하고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언제나 우선인 것. 그 대의. 그 신의. 그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들. 릭은 눈을 감았다. 반듯하게 쳐져 나온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아마도 답이겠지.

“퇴근 하오, 당분간 찾기 말게!”

“어이 릭!”

급하게 사라진다. 알고 있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온갖 떠오른다. 분명히 간 곳이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사노 수도원. 또 다시 그리로 갔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곳인가. 그의 목적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계들을 조심스럽게 내려 본다. 서로 다른 시간들이 돌아가는 시계들을 보다 눈을 감았다.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째깍 움직이는 소리가, 온 몸을 멈추게 만든다. 그러게. 감히 제가 무얼 할 수 있겠어.

 

 

◈ ◈ ◈

 

 

벨져, 꼭 그래야만 하겠나. 걱정 어린 목소리. 일부러 새벽을 골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내려 보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볼 뿐이었다. 아침 이슬이 축축하게 온 몸을 적셔댔다. 옳은 행동이야. 옳은 일이고, 이것이 모두 옳을 것이었다. 멀리 사라지려는 움직임에 그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나는 널 막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벨져. 부디 돌아와라.”

그의 형이 내뱉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 ◈ ◈

 

 

코를 막아댔다. 코끝까지 몰려오는 더러운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 살의 가득한 냄새였더라면 차라리 나을 지도 모른다. 온갖 혼합한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지독하게도 죽여 댔군.”

그것들에 대한 평이었다. 루사노 수도원, 그곳은 다가가는 것조차도 역겨웠다. 벨져는 잠시 몸을 돌렸다. 그것들을 향해 서있을 수 없었다. 다른 곳에 잠시 이동하는 것이 옳았다.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아름다웠고 자애로운 신은 어디에 있고 남은 잔재는 악 뿐이더냐. 한숨이 튀어나왔다. 잠시 시선을 옮기다 무엇인가 들리는 소리에 몸을 틀었다. 숨기는 것이 옳았다. 숨을 참고 시선을 거두었다. 뚜벅, 움직이는 소리는 이내 그 자리에 멈췄다. 적인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칼 손잡이에 손을 쥐고 천천히 숨을 내리 쉬었다.

“저런,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뭔가. 그대.”

“글쎄요. 그러나 벨져 홀든 당신이 바라는 것을 이뤄줄 수는 있겠습니다.”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의 오명을 씻어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조작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입니다.”

칼을 칼집에서 뽑아냈다. 차락, 거리는 소리가 꽤 귀에 좋게 맴돌았다. 얼마든지 피를 먹여달라고 애태우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조용히 그 사내의 얼굴에 칼을 가져다 대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더냐.”

“그 머리, 그 눈동자. 당신의 모든 것! 우월한 유전자! 그것이지!”

“지긋지긋하군.”

“프리츠는 실패작이다! 프리츠의 것들은 쓸모가 없으니 치워버리고 고결한 홀든의 피를, 연구에 사용하는 것이 목표지!”

칼을 휘둘렀다. 시끄러운 소리, 목을 베어버렸더니 피가 튀어나오질 않았다. 설마. 벨져는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함정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몸을 돌리어 빠르게 도약하였지만 무엇인가 찝찝하게 마음 한 구석을 눌러댔다. 불안함, 극도의 불안감이 온 몸을 휩쓸었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됩니다. 홀, 홀든.”

뒤통수에 식은땀이 흐를 듯 했다. 뒤를 돌아 그것을 바라보니 그것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시체 더미, 몸을 에워싸는 연기와도 같은 안개, 동공은 이미 흔들린다. 저번과 같은 역한 냄새가 온 몸을 에워쌌다.

“홀, 든.”

“홀, 든.”

짤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서 벨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 했다. 칼을 들고 경계 아닌 경계를 해댈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소음과 냄새. 벨져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호흡을 내뱉어댔다. 치즈 냄새에 길을 잃은 쥐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무엇이라고.

 

지독하게 맹세한 일이었다. 언제나 늘.

 

◈ ◈ ◈

 

 

“지독하긴.”

남자는 이제야 쓰러진 은색 머리카락을 보며 침을 내뱉었다. 지독하고, 포기라고는 모르는 남자, 남자의 허벅지에 자상이 가득했다. 스스로가 굳어가는 몸에 칼을 찔러대고 버티어대는, 그 모습은 괴기스러우면서도 고고한 이의 품격을 보여주는 듯 했다. 칼을 지지대 마냥 버텨 서있던 남자는 바닥에 주저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보였던 눈은 감겨있었다.

“꽤 괜찮은 수확이야. 그렇지 아니 한가?”

남자는 뒤를 돌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몸을 돌렸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스산한 긁히는, 귀가 아픈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를 바라보다 눈을 찌푸렸다. 지금 제 자리가 좋지 않아서 그랬을 뿐, 저 자리는 원래 본디 제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약속했던 이들은 모두 사라져있었다. 미쳤다. 그래 미쳤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을 하는 것에는 대의가 필요한 것이다.

“벨져 홀든을 포획한다.”

온전한 능력자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홀든. 홀든의 정확한 데이터만 있다면, 얼마든지, 능력자들을 괴멸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미소 지으며 늘어진 은빛 머리칼을 본다.

“박사, 이제 일을 시작해볼까? 아, 이제 엉터리 프리츠는 필요 없을테니 그 노인네를 처리하자고, 아! 크리스티네를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누른다. 손바닥에 벌겋게 귀한 데이터가 남는다.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대니 불순한 냄새가 아닌 오롯이 고귀한 이의 냄새만이 날 뿐이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을 하지 않았던가.

“가자고, 신세계를 열어보는 거야.”

늘어지는 은색 머리카락을 보며 괴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 ◈ ◈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눈을 다시 감았다. 벨져는 이내 자신의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벨져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평이한 기분에 몽롱하게 머릿속을 뛰어다닐 뿐이었다.

아, 익숙한 사람이다. 그나마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이었다. 조금 익숙한 온기를 지나쳐 처음 칼을 잡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처음 만났던 문, 오롯하게 자신만 볼 수 있었던 문. 문을 조금 열어 본 곳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그 자리에 서있던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알고 싶었던 진리가 두려워 몸을 돌려 외면했던가, 조금 열어둔 문을 왜 외면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대의의 몰락, 눈을 꾹 감아댔다. 아무도 믿지 않는 그 사람의 진실, 전부 믿어주길 바랐건만, 믿는 이는 그 사람의 딸과, 자신뿐이었다. 그 사람이 그럴 리 없습니다. 뿌옇게 지나가는 진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였지. 그 사람의 딸은? 기억의 파편이 어지럽게 몸을 지배하는 듯 했다. 찌르는 가슴,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정신의 기억에서 손을 휘저어본다. 손을 휘저어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손에 잡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칼은 하늘의 우주이었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우주.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외면하였지만, 그 사이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아련하고도 익숙한 기분이 들어 외면할 수 없었다. 삐이, 울리는 괴이한 소리들. 그 소리를 듣기 싫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손에 쥐여지지 않는 것들, 그것들을 보내고 나니, 아무 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작게 고동치며 포효하는 파편이 손에 겨우 쥐어졌다.

눈을 떠, 눈을 떠.

 

작게 속삭이는 파편마저도 쥔 손에서 결국 바스라 졌다.

 

 

 

2

 

 

파스락, 이번이 두 개째다. 릭은 불안감에 빠져 시계를 자꾸만 내려다보았다.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일한 생각에 비해 분침이 움직이는 소리는 자꾸만 불안한 음을 내어댔다. 평소와 같다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 차렸을지도 모른다. 얼핏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러한 이들이 전혀, 지금은 잡히질 않고 있었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홀든가 앞을 서성이자 비슷하지만, 더욱 무거운 이가 노려보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산책 중이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모습에 눈썹을 올릴 뿐이었다.

“둘째의 손님이로군.”

그의 짙은 목소리에 릭은 그 남자가 본능적으로 그의 형임을 깨달았다. 릭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과거에 잠시 알았던 이었다.

“벨져 홀든은 어디에 있소?”

“알려줄 의무는 없다. 네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군.”

“경!”

몸을 돌려 릭을 바라보는 시선에 릭은 잠시 눈을 깜빡여댔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핏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네게 말하지 않은 걸 본다면, 너를 어지간히 생각했군.”

“무슨…, 소리오.”

“그 녀석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란 소리였다. 사라지기 전에 크리스티네의 편지에 답장을 하고 사라졌다. 그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는 그녀가 훨씬 더 알 것이다. 곧 갈 것 같으니 차는 대접하지 않겠다.”

릭은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곧이곧대로 믿지 말란 소리는, 아마도 그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습격 이후로 벨져의 태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만 들렸던 그날의 시간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럴 수 없었는데 말이다.

손목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불안해져만 간다. 릭은 주먹을 꾹 쥐어댔다. 피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꾹 눌려댔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 것이 어딘가, 릭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단 한 가지 생각이 나는 것이라면, 크리스티네 프리츠, 그녀가 유일한 단서임에 틀림없었다.

착잡하게 게이트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게이트에 온 몸을 빠트렸다. 천천히 걸어 게이트의 끝을 향해 급히 움직인다. 그러지 않으면 더 늦을 것 만 같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릭 톰슨? 그 이후로 얼마만이지?”

썩 그렇게 반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내 침착하게 그녀를 불러주었다. 그나마 면식이 있는 것이라고는 그 밖에 없으니 별 수 없는 부탁이었다.

“다리오 경 무슨 일입니까…?”

릭은 그 자리에서 단박에 그녀가 크리스티네라는 확신을 가졌다. 크리스티네 프리츠.

“네 손님. 적당히 얘기 나눠라.”

그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릭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여러모로 다른 것들이 담겨있었다.

“당신이 왜 나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그렇다면 묻겠소, 벨져 홀든이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단도입적인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동요가 어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잠시 보였다.

“내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오?”

“당신도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그 스스로가 정한 대의이니까요.”

“당신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일?”

“어떻게 당신이…? 그가 말했겠군요.”

릭은 찻잔의 차를 내려 볼 뿐이었다. 아직 뜨거운 김이 어려 댔다.

“사실은, 그것 외에도 다른 일이 있습니다.”

“무엇?”

“그건.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홀든의 일이죠.”

눈썹을 한껏 치켜 올렸다. 다만 확실한 건, 괜한 일에 말려들었을 것이라는 그녀의 말이었다. 릭은 이내 식은 차를 내려 보았다. 오히려 너무 단정한 그녀의 말에 릭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내 잘 전해주겠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의 일에 대해서는 얼추 알 것 같았다. 안타리우스가 얼마나 프리츠를 실험체로 만들었었는지, 그리고 자신은 완성품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릭은 그럼? 이라고 되물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야 뻔합니다. 홀든 가문이 능력자를 어떻게 가장 완벽하게 창조해냈는지 그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아마 벨져 경을 노렸을 겁니다. 다른 형제에 비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그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안타리우스에 누구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기도 하죠.”

“그럴 법도 하지, 중심이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실 줄이야.”

그렇다. 처음 만났던 순간의 그의 태도가 점차 생각이라도 나는 듯 릭은 쓰게 웃었다. 그 눈동자를 어찌 감히 잊으랴. 그녀의 의아한 눈빛을 받고는 고개를 저어댔다.

“경, 일하는 도중에 미안하게 되었소.”

“그를 찾아갈 겁니까?”

“그러지 않을까 싶네만, 날 두고 간 게 괘씸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무슨?”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만 두라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부디, 이제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의 눈에 어린 걱정 아닌 걱정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그렇게 판단하기 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지나치게 성숙한 아가씨가 아닌가.

릭은 턱을 매만지며 이미 식은 홍차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이고 있는 시계는 아직 많았다. 어디로 간 건지 조금씩 기척이라도 남겨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얼마나 자기 의사에 의존하는 이인가. 가슴이 꽤나 미어져댔다.

혼자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아니라고 수 십 번 생각했다. 그를 안고 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진정으로 말했던 적이 있었나. 단지 그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처럼 속삭이었다. 떠나달라는 말에 어떻게 했더라, 어쩌면 예고된 것일 지도 몰랐다. 당연한 예고, 확실치 않은 그의 마음, 그러나 조금이라도 믿고 있었던 간절한 제 마음이었다.

괜히 생각을 해대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홍차는 한 입 조차도 제 입에 맞지도 않았다. 커피가 필요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조금 핼쑥해진 듯 했다. 입었던 옷이 헐렁해지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소식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도 알 수 없는 행방불명.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소망이라고 가장했던 것들은 조금씩 빛이 꺼져댔다. 아 도저히 모르겠다. 릭은 눈을 감아댔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걸까. 모질게 말하던 목소리들이 조금씩 머리를 울려댔다. 사랑, 사랑하오. 언제나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터인데. 허공에 퍼지는 목소리는 형태를 잡아대질 못했다.

“왜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허공에 닿은 목소리에 응답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머리 위로 올려준 신문, 그것을 잠시 내렸다.

“그러게나 말이오.”

“안 읽어보냐? 이번 소식 중에 가장 네가 관심 있어 할 것인데. 홀든의 일이다.”

“그게 무슨?”

“정확한 건 자세히 모르겠고, 은발의 칼을 든 이가 자꾸 나타났다는 소식인데, 꽤 많은 능력자들을 베었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오?”

“자세히 읽어보게나. 아무튼 자네 그렇게 너무 휴가를 남발해서 쓰다가는.”

“오늘도 휴가요!”

어이 릭! 들리는 목소리는 잠시 내려두었다. 그? 확실치 않지만 은발은 홀든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뭣 하러 능력자들을 베었는가. 뛰고 있던 몸을 잠시 멈추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퍽이나 좋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는 신문을 다시 펼쳤다. 신문이 구겨져 자세히 보려고 한참을 신문을 펼쳐댔다.

 

「특보, 은발의 검사 능력자 살해」

「홀든가 경찰의 조사 실시」

 

어쩌면 그가 우려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릭은 급히 홀든가로 향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릭은 은빛의 머리를 가진 이들을 마주했다.

“또 보는 군.”

“이게 무슨 일이오?”

“알 수 없다. 둘째가 스스로 그랬다고 생각하기에는 녀석은 그렇게 멍청한 이가 아니라는 것이 아무래도 크겠지.”

“…그런가.”

“갈 건가.”

“무엇을….”

“그를 데리러 갈 생각이 아니었나. 원래는 홀든의 일이지만, 지금 수사를 받고 있는 터라.”

“모르겠소.”

“그렇게 확신을 하지 못할 줄은 몰랐지만, 다만 하나 말해주려고 하네, 둘째 녀석은 릭 그대 생각보다 꽤 그대를 생각하고 있더군. 전에는 그렇게 말을 하고 싶지 않았네만, 이제는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

“그게 무슨….”

“벨져는 내 조언에 따라 그대를 잠시 밀어낸 것이다. 녀석이 그렇게 마음을 준 상대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은. 워낙에, 사고를 치고 다니는 녀석인 터라 그렇게 하라 조언했다.”

“경.”

“진실로 거짓은 아니다. 그대에게 거짓을 고할 이유조차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야 하지만은, 그러해도 괜찮겠소?”

“잘 데리고 와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맏형으로서의 부탁이네.”

릭은 멈칫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의 말에 한 치의 다른 것도 없었다. 오롯하게 걱정에 어린 것이었다. 괜히 깨져버린 시계를 내려 볼 뿐이었다.

“벨져의 마지막 흔적을 찾은 곳은 루사노, 그 곳이라고 하더군.”

“또?”

“어쩔 수 없다. 모든 곳의 시작이니까.”

눈썹을 찌푸린 것을 들킨 듯 했다. 그래, 모든 것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황홀한 달빛 속에 가득 찬 곳, 그러나 그 달빛은 가장된 것이지. 결코 아름다울 리가 없다. 릭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잘, 부탁하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릭은 몸을 돌려 빛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움직였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되어버리는 곳으로.

 

 

 

◈ ◈ ◈

 

 

아름다워, 아름답고. 당신에게는 무엇을 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내게서 닳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고고하게 당신을 비춰주겠지. 그런 당신을, 어찌 내가 미워할까.

 

그 자리에 선 이를 머뭇거리며 릭은 바라보았다. 익숙한 안광, 그리고 사뭇 다른 이질감이 그의 눈빛을 휘감아댔다. 아냐, 그는 이러지 않아. 눈빛 속에 담긴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큰 신념을 들고 지낸 이었다. 죽은 눈빛을 한 이를 감히 어찌 그라고 칭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서있던 그를-.

 

 

◈ ◈ ◈

 

 

“벨져…!”

힘겹게 그 이름을 부르지만은, 그 자리에 선 그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달려든 빠른 움직임에 릭은 머뭇거렸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감히 어찌 제가 그를 해할까, 불확실한 그 생각을 마친 후에야 릭은 차갑고 서늘한 것이 제 몸을 관통했음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릭은 움직이질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댔다. 아무런 눈빛이 담겨 있지 않은 당신의 얼굴이, 퍽이나 그날 같군. 숨이 죽여질 듯 죽여지질 않았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 자리에 머물 뿐이었다. 툭 떨어지는 흐릿하고 비릿한 냄새. 그 냄새를 타고 올라가면 공간의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벨져의 옷자락을 꽉 잡고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선을 부드럽게 쓸고 웃음을 흘렸다. 말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의 언어뿐이었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이렇게 빙빙 돌아 찾아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오.”

가느다란 목소리를 들었던 건지 아니면 듣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흐린 눈빛에 조금씩 담기는 하나의 가느다란 빛이, 너무나도 꿈결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릭, 그래. 릭. 나의 릭.”

덜덜 떨리는 힘을 잃은 듯 가련한 어깨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빛들이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음을 말할까. 떨리는 떨림이 박힌 칼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떨리는 느낌, 벨져 그의 느낌을 따라 올라가면 눈에 박히는 것들이 보인다. 마치, 꿈, 같은-, 오로지 그와 그의 세상이다. 모든 것은 빠져서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은 것들이 없다. 둥둥, 떠다니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무중력의 상태와도 같은 기분이다.

“이건 꿈이길 바라오.”

꿈이길 바랐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귀를 닫고 목을 닫고, 서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누르고 자르지 않았던가. 꿈이길 바랐다. 뚫린 것이 가슴이 아닌, 하나의 다른 점이겠지. 전환점과도 같은 것.

“그래, 이건 악몽이야.”

지독하고도 달콤한, 꿈이자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을 악몽이야. 꿈속의 속삭이던 목소리는 어느새 현실이 되어서 다가온다.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릭이 울컥하고 피를 토해댔다. 역류하는 피를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벨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가없었다.

지독한 오만이다. 지독한 오만은 지금껏 일을 어찌 만들었던가. 그래. 그렇게 모두 제 곁을 떠났다. 오만함에 질린다는 눈빛을 던지며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내뱉어 주고는 했었지. 그런데-. 이는. 이 남자는.

손에 잡던 힘이 풀렸는지 점차 바닥에 천천히 고꾸라지는 그를 잡을 새도 없었다. 성급하게 칼을 뽑아낸다면, 잘못될 수도 있었다.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를 데리고 움직였을 지도 모른다. 똑바로 정신을 차린 이 와중에 드는 사실은 수 없이 맞았던 피가. 너무나도 뜨거워서 제 눈을 적시게 만들기 충분했다는 것이었다.

“릭.”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의 흙을 움켜쥐며 숨을 토해댔다.

“나의 릭.”

그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하나만 달려가는 어리석은 제 자신 때문에 피해를 받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 이었을 텐데, 왜 남은 건 고꾸라진 릭 그대인 것인가.

쏟아지는 후회, 그 후회는 언제나 늘 그를 무너트리기 충분했다. 무너지고, 또 다시 무너진다. 결국은 고독하게 그 자리를 꼿꼿하게 서버렸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 그 문의 작은 틈을 연 순간 그런 것은 바라면 아니했던 것인가. 그것이 강함이라면, 고독히 한 자리에 선 듯, 강함을 내보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문을 닫는 것이 옳았다. 바닥에 토해댔다. 그동안, 모든 것들을 외면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일 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어리석었던 것은-.”

진정으로 어리석었던 것은 쓰러지는 자리를 알면서도,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벨져 홀든, 그 자신이었다. 벨져는 그 자리에서 멍청하고도 공허하게 한참을 서있었다.

식어가는 그의 몸에 자신의 체온을 옮겨 낸다면 이내 숨을 다시 쉴 것 같다는 멍청한 꿈속에서.

 

 

◈ ◈ ◈

 

 

둘은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두 손은 결코 놓아질 듯, 놓아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서로 걷는 걸음은, 너무나도 가볍고도 서로의 느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 거리며 하고 싶었던 언어들을 내뱉는다. 둥둥 떠다니는 세상 속에서 남은 것은 서로의 느낌이었다.

‘사랑하오.’

‘나 또한 그대와 같아.’

지워지지 않을-. 서로를 향한 진심이 드디어 닿았다. 외로이 혼자이었던 남자는 그제야 제 옆에 누군가를 두었고, 따스했지만 지낼 곳이 없던 남자는 그제야 지낼 곳이 생겼었다. 서로가 서로의 자리임을 알기 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끝까지,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고만 말하곤 했지. 내, 그 말을 감히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그대도 알 거라 믿어.”

미약하게 쉬는 그의 목소리와 숨소리를 잊지 않으려는 듯 내려바라본다.

“그래 줄 거라 믿어. 언제나 내 옆에 있던 것처럼, 계속 그리 해주는 건 어떤가. 물론-. 그대가 대답해줄 수 없단 건 알고 있다.”

깊게 눌려버린 칼을 빠르게 빼어 낸다. 비처럼 쏟아지는 것이 냄새조차도 잊어야만했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붙잡고 손으로 꾸욱 누를 뿐이었다. 우는 것인지, 아니면 비처럼 쏟아진 것이 얼굴에 닿아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그를 붙잡고 다른 곳들을 바라보다 길을 가로 막은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저런, 결국은 돌아온 건가. 역시 홀든의 우월한 유전자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군.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올 줄은 몰랐으나! 우매한 프리츠는 그 쉬운 정신 지배를 탈출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무슨?”

“네 더러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것이 오로지 전부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것 마냥 순간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고요하게 달빛이 아래에서 흘러댈 뿐이었다. 누구의 피라고 할 것 없이, 그 자리를 열어댔다. 아주 작게 열린 틈을 바라보았던 이는, 결국 그 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것이 강함일 리가 없다. 누군가를 잃은 채로 혼자 외로이 서있어서 얻는 강함이라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 진리를 외면한다. 바라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숨을 쉬어. 릭. 어떻게든. 돌아 가야하지 않겠나. 나와 되돌아가야지.”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 없지만, 깨져버린 시계의 분침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가엽게 움직이는 시침을 따라 가야하지 않은가.

 

 

◈ ◈ ◈

 

 

‘당신의 우주가 되어주겠소, 어떤 것이건 할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우주 말이오.’

‘그렇게 거짓을 고할 필요는 없다.’

‘그게 아니오, 그렇게 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오.’

‘릭.’

‘당신에게 어느 것이건 바라지 않소,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시오.’

‘릭 톰슨’

‘단지, 내 가슴 속에 당신을 품었다는 것만 잊지 마시오. 그것이면 될 터이니.’

그 말을 듣고 머뭇거리던 시간들이 밉게 지나갔다. 그 말에 머뭇거리지 말았어야하지 않았는가. 모든 것을 왜, 그리도 어리석었기에, 이렇게 되어버렸던가. 괴롭다. 왜. 차디 찬 바닥에 누워서 미동조차 없는가. 단지,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인가. 알면서도 모든 것을 외면한 내 탓인가. 아아,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파르르 떨리는 손바닥에 남은 것이 그의 온기임을 애써 왜 부정하려 하는가.

“릭.”

바닥에 주저앉아 바라본다. 왜 그리도 평온한 얼굴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약하게 숨을 쉬는 것인지 가슴이 조금씩 거린다. 그것에 그제야 안도를 해댔다. 아직 그는 살아 있었다.

“내 우주가 되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눈을 떠야지. 왜. 아직도 그러고 있나. 겨우 기쁘게 맞으려하는 나를 두고 말이야.”

얼굴을 내려 보며 몸을 숙였다. 작은 달싹거림과도 같은 하나의 입맞춤이 떨어졌다. 짭짤한 눈물과, 피의 맛, 사내의 입술은 그런 맛이 났다. 벨져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의 능력으로 이어진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실 듯 남아있는 그 자리에 올라섰다. 눈을 뜰 수 있겠지. 아마도.

그 자리에 올라서자마자 훑어 지나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조금씩 담긴 하나의 공간들은 어느 순간 넓게 퍼졌다 좁아지기 일 수 이었다. 그제야, 그가 연결한 곳을 바라보았다. 애석하게도, 그 자리는 돌아올 곳이었다.

“벨져.”

“형.”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없이 벨져가 데려온 이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며 가문의 이들을 데려와 살펴보게 했다. 별 일 아니라고 말할 때까지 강압적인 벨져를 막느라 애를 쓴 것 외에는 별 것이 없었다.

“그의 마음을 이제야 알았나. 크리스티네에게 연락이 왔다.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말더라군. 더불어 내 마음도 그렇다.”

“실수라는 것을 알아.”

“근신이다. 벨져. 난 네게 경고 아닌 경고를 수없이 해왔다고 생각한다. 네가 하던 일은 내가 매듭을 지어주겠다. 프리츠 경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벨져, 네가 묻겠다. 문은 다시 보았나?”

“아아, 닫아버렸다. 내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파악했지.”

“별 일이군.”

내려두는 찻잔의 고요함을 바라보며 벨져는 의아해했다. 어떤 점에서? 달싹거리며 묻고 싶었지만 나가라는 손짓에 침을 삼켰다.

“내 생각이지만, 릭 톰슨 그 자는 퍽이나 다정한 이라 생각한다. 벨져.”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

“글쎄, 잠든 이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 치지.”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솔직해져서 보기 좋구나, 벨져.”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형의 말에 벨져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쓰게 웃을 뿐이다. 제 형 조차도 놀리는 상황이라니. 퍽이나 재미를 느낀 무표정과도 같은 표정에 몇 년 간 놀려먹을 생각이냐며 되묻고 싶었지만 참아댔다.

발걸음을 옮겨 간 곳은 칭칭 붕대를 감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우주의 앞이었다.

사실 생각해 본다면, 그에 대해서는 꽤나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던가, 기억을 잊는 순간에도 그의 포근함을 잊지 않을 정도로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질 않았던가. 곤히 잠든 그의 얼굴에 손바닥을 잠시 올렸다 놓았다.

“릭.”

목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간이 찌푸려졌다 풀어졌다. 듣고 있나. 되물으며 그를 내려볼 뿐이었다.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함께 해줄 것인가. 이게 그대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꿈틀 거리던 눈썹이 그제야 조용해졌다. 평온한 미소와 포근한 목소리가 다시 들리길 바랐다.

“그래 줄 것이오? 무모한 짓은 다시는 안하겠단 소리인 거지?”

눈을 뜬 큰 우주가 그에게 되물었다. 벨져는 결국 흘리지 않았던 웃음을 흘려댔다.

“약조하지.”

“진정으로?”

“진정으로.”

진작 그랬으면 좋지 않았소! 가슴팍에 붕대를 칭칭 맨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터질 뿐이었다. 아아, 인정함이 이리 쉬울 줄은 누가 알았던가. 서로 품는 마음이 같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것이 아닌가. 우스울 뿐이다.

“이제, 사라지지 마시오, 어딜 가건, 어떠한 일을 하건, 날 두고 가는 무모한 짓을 하지 마시오. 대의? 그래 그런 것쯤이야, 이해할 수 있소, 그러나, 굳이 그 짐을 혼자 질 필요는 없소, 벨져. 내 말을 이해하겠소?”

“이해, 했다.”

“좋소. 이제 됐군.”

“뭘 그런 말을 하나.”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니까. 당신은 그 작은 머리로 혼자 생각하곤 하지 않나. 이제는 둘이 나눴으면 좋겠소. 뭐든지.”

“…노력하지.”

먹먹한 서로를 향한 침묵 속에 겨우 몸을 반 쯤 일으킨 릭이 벨져를 바라보며 웃어댔다.

“그런 의미로, 나는 아직 당신의 답을 듣지 못했는데.”

“그러니까 나는 릭…, 그대를, 내 우주라고 생각한다.”

“그 뿐이오?”

“애석하게도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그 것 뿐이야.”

달아오른 얼굴을 감춰보려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에 릭은 퍽이나 유쾌한 미소를 흘려댔다.

“그거면 됐소, 당신에게 큰 것을 바라지는 않아.”

“릭.”

“당신이 얼마나 어려운 이라는 것도 알고. 이제는 혼자 걷지 말고, 이제는 좀 서로 걷는 건 어떻소, 같은 걸음으로 가는 것, 나는 꽤 바라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그래, 어쩌면 이런 것을 바랐을 지도 모르지. 벨져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 그리고 벨져.”

“무슨?”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네만, 잠깐 이리 와보는 건 어떤가.”

고개를 숙여달라는 듯, 손짓하자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숙여댔다. 가볍게 입술을 닿았던 것이 있었다. 텁텁하고 짙던 피 맛이 아닌 빛과도 같은 따스한 맛들이 맴돌았다.

“몰래 입 맞추니 좋았소?”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색이 들킬까 벨져는 시선을 돌려댔다.

“그럴 필요 없소, 이제는. 알겠소?”

뺨을 가볍게 누르는 손끝에 눈을 감았다. 그래. 알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온도를 적당히 느껴댔다. 입술 선을 가르는 짧은 입맞춤은 점차 짙어져 깊은 온도를 추구하기 마련이었다.

“사랑하오.”

“릭, 그래 릭, 나의 릭.”

“이게 꿈이 아니겠지.”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못해 온 몸에 열이 솟구쳐댔다. 서로를 보는 시선은 열이 담긴 그런 적정한 온도이었다.

“꿈이 아니지.”

“그거면 됐소.”

부드럽게 시선을 교환하며 웃음을 흘렸다.

 

◈ ◈ ◈

 

 

후회하지 않아? 이 문 너머에는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이 담겨있어. 끝없이 무한대와도 같은 강함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지. 조금이라도 엿본 너라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물론, 그랬었지. 다만, 그것이 내가 바라는 강함은 아닐 뿐.

제법 싱거운 생각을 하네. 영원한 고독의 자리를 얻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너 같은 사람 부류들은 줄 곧 문을 완전히 열곤 했지. 좋아, 문을 다시 닫아. 두 번째 아이야. 다음번의 아이는 완전히 열었으면 좋겠다. 고독감을 영원히 느낄 줄 아는 이로. 그런 이가 좋겠다.

아아, 그런 이는 아마도 없을 지도 모르겠군. 홀로 강함이라는 것은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은 아니야.

사라지는 문의 윤곽을 따라 벨져는 씁쓸히 웃었다. 그것과 같은 강함을 바라지 않는다. 영원히 누군가를 버릴 만큼의 것은 아니었다.

‘강해져라, 벨져.’

결국 하나의 단편적인 기억을 쫓아, 누군가를 잊을 실수를 하지 않았나.

 

 

 

 

 

About. They.

릭은 숨 막히는 긴장감에 빠졌다. 그 사건 이후로 시간이 꽤나 흘렀다. 그것 까지는 좋았다. 벨져와 사이가 좋아진 것도 굉장히 좋았다. 홀든가에 자주 드나들어도 괜찮았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오늘 약속에 따라 나온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프리츠에 간다는 말에 덜컥 같이 가겠다고 말을 한 것이 실수가 된 듯 했다.

두 귀족 자제가 만나서 하는 것이라고는 향이 좋다고는 하지만 맛이 없는, 그것도 릭의 취향이 아닌 홍차를 무한히 마시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 껴있는 이유조차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깊은 냄새를 풍기는 홍차의 내음은 퍽이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멍청한 짓을 하셨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나온 말이 고작 저 말이었다. 심상치 않은 이 분위기가 무겁다.

“아아, 그랬지. 안타리우스가 날 노림을 알고 그리 굴었으니 말이야.”

“그것이 멍청하단 것입니다. 경이 그리 생각이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경이 안타리우스를 찾은 이유가 프리츠 라는 걸 알면!”

“설령 그것이 멍청한 가십거리가 된다고 하여도, 상관없지 않나.”

“그건 내가 상관있소, 벨져.”

“과자나 더 집어 먹는 게 어떤가.”

가십거리에 퍽이나 예민해하는 꼴에 벨져는 한숨을 쉬어댔다. 그게 무엇이라고 그새 또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설령 그 루머에 네 혼삿길이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물론 네가 홀든을 바라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다시 말이 끊어져댔다. 릭은 그 분위기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속을 채울 커피가 필요했다. 시계가 움직이는 것만을 한참을 보다 이 침묵이 겨우 깨져가는 것을 느꼈다. 찻잔을 내려놓는 벨져가 있었다.

“경은…, 괜찮은가.”

“아직은, 혼란스러워하십니다. 이번에도 홀든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형이 일을 아무래도 잘 해결 한 듯 했다. 전과는 같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딱 하나 다행이라면 이따금 정신이 멀쩡해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거 다행이군.”

“다음부턴 홀로 무모하게 돌진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도 당혹스러워하셨습니다.”

“아아, 앞으로 그러지 않기로 약조한터라, 아마도 그러지 않을 것 같군.”

“그거 참, 다행이라고 칭해야합니까? 경이 찾아낸 파편이, 아버지의 상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파편을 손에 쥐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릭이었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을 잠시 잃었을 때 손바닥에 박혀 있더라고 하더군, 그것이 경의 기억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릭은 제게 박히는 시선 때문에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찔렸을 당시 안광에서 보였던 그 희미한 조각을 손에 쥐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되었다.

“그리고, 이건 아버지가 잠시 괜찮았을 때 쓰신 편지입니다.”

“고맙다. 크리스티네.”

“별 것 아닙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한참을 그것을 보다 못해 눈물까지 흘려대겠지. 아직까지 그를 이루는 것이 자신이 아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괴롭지만, 별 수 없었다. 벨져 홀든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가보십시오.”

“수고해라.”

그 숨 막히는 자리를 드디어 벗어났다. 릭은 그의 손을 괜히 꽉 쥐어댔다.

“무슨 일이 있는가.”

“별 일 아니오.”

“내가 볼 땐, 있는 것과 같은데, 아닌가.”

“아니오.”

“또 다시 이게 연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애석하게도 그렇소.”

“못 말리겠군.”

그 말에 무슨 말을 더하랴, 릭은 애써 쓰게 웃었다. 별 수 없었다. 다가서려면 하면 반드시 한 벽이 있었다. 그를 이루는 가장 큰 벽, 그 벽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이 이리도 힘들 줄은 몰랐다.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벨져 그가 차분히 편지를 뜯어댔다. 그리고 이내 글씨를 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오.”

“잠시만, 이렇게 해주면 안 되겠는가. 릭.”

“무슨…?”

“부탁이니, 들어.”

얌전히 알겠다는 듯 릭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닿는 온기가 무엇인지 알았다.

“말을 하시오, 벨져.”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서있던 그의 모습에 의아한 릭이었다. 릭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파묻는 듯,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에 결국 포기했다. 축축하게 가슴팍의 옷이 젖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무너지게 만들었을까. 고고한 홀든가의 둘째 도련님을.

“알겠소, 아무 것도 묻지 않겠소.”

그저 그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애석했다. 릭은 미약하게 떨리는 이를 품에 안고 조용히 중얼 거렸다. 작은 자장가와도 같은 노래를 부르며 그를 진정시킬 뿐이었다.

“또 무엇이 문제오, 무엇이.”

“문제랄 것은 없다. 다만, 다만.”

말을 잇지 못하는 이를 어찌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릭은 그저 제 품에 그를 다독일 뿐이었다.

“다음에, 말해줄 거라고 믿겠소, 거짓을 고하지 않기로 했으니.”

“말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야.”

“알고 있소.”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를 쓸었다. 다만 하나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온도가 퍽이나 괜찮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틀렸지만. 아무렴.

“돌아갈까?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을 땐 그 방법이 적격인 듯 해.”

“못 말리겠군.”

“이게 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은 것 때문이오. 벨져.”

“알고 있다.”

껴안은 채로 처음과 끝의 시작점을 열어 그를 바라본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대로 돌아갈 것이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말이지.”

릭의 목소리는 그렇게 공간에 닿았다. 공간에 닿은 그의 숨결과 행동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오기 마련이다. 별이 쏟아질 듯 아슬 아슬한 경계가 이어진 곳이었다. 강물에 비친 별이 아름답다. 그 사이에서 무엇을 하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내 방법은 이런 것 밖에 모르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리하자면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딱 하나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싫어도 나는 당신의 끝을 따라갈 것이오. 당신이 전부 이렇게 만들어버렸으니, 당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이기도 하지.”

“릭.”

“이제야 바라봐 주는 군. 벌겋게 물든 자국이 나로 인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역시 당신이 나를 바라봐주는 것이 좋소.”

“좋아한다.”

“알고 있소. 그것을 내 귀로 들으니 향기롭고 좋은 것 같네.”

릭은 우물쭈물 거리는 그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걷는 것 마냥 비춰지는 강에 발을 올렸다. 천천히 걷는 것은 별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나의 전부다.”

“벨져?”

멈춰선 그 걸음에, 릭은 미소를 지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감정표현을 똑바로 하지 못하는 작은 도련님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씨익 웃으며 손을 끌어 그를 바라본다.

“이제는 말해줄 것이오?”

“그래 모든 것을. 전부, 그대에게 고할 것이다.”

“내가 쫓아다녀도 더는 피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사실은, 그대가 없는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떠오르지도 않아.”

“벨져, 늘 사랑스러웠지만은, 오늘이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인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군. 그대와 있는 이 공간과 함께.”

발끝이 물로 천천히 젖어댔다. 별이 발끝에 스며드는 듯 천천히 우주에 빠져든다. 하나의 일원이 된 것 마냥, 그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조용히 고개를 들어 벨져는 릭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놀란 그의 눈동자와 시간과 분위기를 외면한 채 감정의 확신 앞에 승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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