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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
생각을 해보게나.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생각 또한 변하지 않을 답이었다. 그게 자네의 답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옳겠지. 그의 표정에서 무엇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내 답이 될 것 같다.
그 답의 정답은 없었다. 애매모호한 대답, 그 대답에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던가. 그는 단지 흔들리는 일렁이는 눈빛을 보일 뿐이었다. 애매한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난 것은 한숨과 거두어진 눈빛뿐이었다. 너의 질문에 회피한 것이 아냐. 회피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저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기엔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저, 네가 말한 것은 나를 괴롭히던 하나의 생각이었다. 연모? 웃기기도 하지. 그런 생각을 하기엔, 너와 나는, 너무 멀게 오지 않았나. 손가락을 책상에 두드려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턱을 괴면서 한숨 아닌 한숨을 쉬었다. 하나의 작은 생각과도 같던 점이 저를 덮쳐온다. 하나의 점이 점차 커져, 눈앞이 캄캄해진다. 오늘의 답은 결코 실수가 아니었음을 저는 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것임을 저는 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일에 대해서 미리 겁을 먹고 있었다. 겁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숨을 쉬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 마냥 침대에 몸을 누웠다. 구차한 생각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엔, 그런 감정을 생각하기에는, 그러기에는, 두렵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운 것일 지도 모른다. 서로, 무슨 감정이었던가, 우리는, 그저, 친우가 아니었나.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 눈을 감았다. 아니라고 생각하기에는 성큼 다가온 말과 기억들이 가만히 있던 저를 괴롭혔다.
‘자네를 연모해.’
그 목소리에 머릿속이 다시 엉망이 되었다. 나를? 거짓이라고 하기엔, 그의 표정과 목소리, 심지어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한 얼굴이 당황시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애써 당황한 척을 하지 않으면서 장난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니, 그게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에 저는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솔직히 말하자면은, 당황한 것이 맞다. 애써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지. 이게 무슨 일인가 잘난 머리로 생각해도 머리는 답을 쉽게 주지 않았다.
‘농담하지, 마라. 알베르토, 로라스.’
힘겹게 한자, 한자를 내뱉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일에서 미리 겁을 먹게 한다. 나는 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서 이 일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떠한 태도로 녀석이 저를 대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 무엇인가 엇나가는 것을 알기에 그 엇나가는 것을 붙잡아야했다. 그것이 옳다는 ‘정의’를 저는 알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눈 앞에서 보이고 한숨을 쉬며 알겠네. 그게 자네의 답이라면. 굳힌 듯 사라지는 목소리가 저를 대했다. 그래, 이게 내 답이야. 저는 잔인하게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단호하게 대해놓고는, 이렇게 누워서 첫 사랑이라도 경험한 소년이라도 된 것 마냥, 굴고 있지 않은가. 어이가 없기도 하지. 눈을 깜빡이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변하는 관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애매한 답 속에서 녀석은 분명, 원하는 답을 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답을 그러면, 주지 않으면,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무겁게 눈을 감았다.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자. 그 말을 하지 않았던 안일한 제가 후회라도 되는 것처럼.
변한 것은 우습게도 없었다. 변한 것이라면, 저 녀석이겠지. 말을 해놓은 것은 저면서 무슨 일을 친 것 마냥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부러, 정말 일부러 그 태도를 저는 무시해댔다. 아니, 눈치라도 못 챈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굴었다. 그래야, 서로 편할 것이 아닌가, 녀석은 지나치게 저를 의식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지나친 의식이었다. 다른 사람이 불편할 만큼의 지나친 의식. 숨이 막힐 듯 그 의식에 저는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 지침 속에서 결국 못 참고 녀석에게 한 마디를 다시 던졌다.
‘네가 나를 연모하던, 무엇을 하던 상관하지 않아. 애매모호한 내 대답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알베르토. 내 답은.’
‘그만, 그 소리는, 다음에, 다음에 듣게 해주게나. 아직은, 아직까진, 듣고 싶지가 않네.’
‘그렇다면, 네가 정말로 그걸 안다면 내 앞에서 끝까지 숨기란 소리다. 그렇게 부탁하는 것이다. 지금.’
‘…지독하게 잔인한 소리군. 알겠네, 자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겠네. 드렉슬러,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했던 소리가 아냐, 다만, 알아주길 바랐을 뿐’
‘그거 참, 이기적이군.’
‘자네 앞에서 이기적으로 되어버린 것 뿐 이지.’
꾹 다문 입술을 티를 내지 않은 것처럼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쉽다. 녀석은 쉽다. 이런 말을 하면 그 사이에 제 힘을 내리고는 한다. 이런 것을 제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저는 그 말에 벙어리가 된 것 마냥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간 이상해질 것 만 같았다. 진정으로 이상해질 것 만 같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묘한 침묵은, 저와 그 사이에 전혀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녀석은 답지 않게 하나만 보고 있고는 했다. 하나 외에는 집중을 못하는 그런 성격, 지금은 그게 제가 되어버린 것 만 같지만 말이다. 한숨을 푹 쉬면서 천천히 도안을 그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말을 해놓고 녀석을 위한 갑옷을 생각하고 있는 제가 우스울 뿐이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조금 더 가볍게,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경량화 된 것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저는 결국 제 품에서 손에 놓았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회사에 아이들이 많으니 피우지 말라는 소리에 그만 두었던 담배를 녀석 때문에 다시 물었다. 후 하고 폐를 지나쳐 온 몸으로 연기를 마시어댔다. 그만 좀 사라져라, 애써 담담한 척했던 네 표정.
덤덤하게 그 방문 앞에 선물을 두고 사라졌다. 직접적으로 보기에는 아직까지는 저는 겁쟁이나 다름없었다. 덤덤하게, 그래 애써 덤덤하게 생각했다. 다음에, 정말 다음번에 제 답을 확실히 주겠노라고 휘갈긴 종이 쪼가리를 넣었다.
****
같이 공성에 나가게 되었다. 녀석은 보란 듯이 제가 선물한 것을 입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라고. 저는 뭔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시선을 전투에 집중했다. 습관적으로 저와 그는 긴장하지 않으려는 듯이 짧은 대화를 이어댔다. 긴장을 풀지 않았다가는 그러지 않다간 금세 죽고 말테니까. 수십 수백 번을 해온 일들이긴 하지만은,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제 몸을 감싼 비릿한 철의 냄새, 그리고 적을 찌를 때마다 그 냄새가 섞였다.
잠시 괜찮아진 것 같아 습관적으로 눈으로 그 녀석을 쫓았다. 곧, 다리에 힘을 집중해서 뛰어오를 것이다. 뛰어올라 자유를 느끼는 그 순간, 서있는 모두를 끝낼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을 꽤나 매력적이었다. 고개를 뒤로 한 채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곧 점이 되어 쏟아질 것이었다.
하지만. 제 예상은 우습게도 빗나갔다. 예상치 못한 일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지. 새가 비상하는 것을 방해라도 하는 듯, 무언가의 공격에 그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모든 것을 멈추고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알베르토 로라스!”
녀석의 이름을 부르고 달려 나가자 제가 알고 있었던 녀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한 없이 비상을 잃어버린 날개가 꺾여버린 새와도 같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제 스스로가 생각했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바닥은 어느새 무엇으로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사고가 정지한 것 마냥 머릿속이 새 하얗게 변해 버렸다. 생각해. 지금 네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
하얗게 멈춰버린 사고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쥔 창을 내려놓고 녀석에게로 뛰쳐나가는 것뿐이었다. 견고하게 만들었던 갑옷 사이에서 하나의 틈이, 그 작은 하나의 틈이 조금의 틈을 허용하여 완전히 파괴 되어있었다. 그게 제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이야?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하나의 작은 틈새 사이로 파고든 하나의 총성은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큰 파괴력을 자랑했을 지도 모른다. 새 하얗고, 제 눈 까지 컴컴하게 굳어져버렸다. 이제는 아무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이게 모두 전부 다, 제 탓이라는 것인가. 착잡하게 굳어버린 표정으로 새 하얗게 질려버린 녀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갑옷 속에 파묻혀버린 얼굴은 시체처럼, 마치 생을 마감한 사람인 것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더니 가느다랗게 쉬고 있는 숨소리에 멈춰버렸다. 그는 아직까지는 살아있었다. 아직까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멈추었던 온 몸의 사고 회로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굴어야지.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생각을 하던 생각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선 녀석이 숨을 쉴 수 있게 갑옷을 벗겨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이 파고들어 그의 갑옷의 연결 부분을 천천히 눌러 벗겨댔다. 다행히도, 제가 만든 갑옷은 이 점에서는 뛰어났다. 내구성에서는 아웃일지는 몰라도, 이 점에서 만큼은, 뛰어난 편이었다.
벗겨낸 갑옷 틈에서 얇은 옷이 그제야 드러났다. 어디에 관통당한 것인가. 총성은 두발 정도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맞은 곳은 아마도 어깨 죽지ㅡ유추하건데, 가장 피가 많이 고여 있었다.ㅡ그리고 머리 쪽의 투구 부근이었다. 투구의 내구성은 꽤나 우수하게 만들었다고 제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었던 터라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라고 제 스스로도 확신 아닌 확신을 해댔다. 그것이 무색하게 투구는 흉측하게 뭉개져 있었다.
그는 괜찮을 거야, 그는 괜찮을 거야. 제 스스로의 확신은 점차 커져서 저를 안심시켜댔다. 이 안심이 오래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가 좀 더 잘 만들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지 않나, 제가 더 잘 만들었더라면 녀석이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가 그렇게 된 일은 모두, 전부 모두, 제 탓임에 틀림없었다. 제 실수는 그렇게 그를 만들어버렸다. 전적으로 제 생각에, 모두 제 탓이었다.
제 손바닥에 흥건하게 닿은 핏물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제 손바닥에 남았다. 뜨겁고 뜨거운 액체가 제 손을 타고 바닥으로 축축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위험해. 위험한 일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손바닥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피가 가득 묻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쳐댔다. 충격이 큰 건지, 아니면 정말로 큰 문제인 건지 저는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떠라. 알베르토!”
가벼운 쇼크인지 숨을 쉬지 않으려하자 가슴팍을 한껏 쳐댔다. 귀를 대어도 심장이 뛰질 않는 것 같아 당혹스러움에 더 가슴을 눌러댔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판단한 건지 급하게 의료를 담당하는 이들이 그를 잡아댔다. 출혈, 너무 심합니다. 호흡, 정지한 듯합니다.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뱉어대면서 저를 멈추게 해댔다. 알아, 안다고. 아니야,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녀석이 실려 간 곳을 쫓아서, 터덜터덜 걸어댔다. 이리도 쉽게 무너질 녀석이 아닐 텐데. 그럴 텐데. 시체가 된 것처럼 누워있는 꼴을 보자 제 머릿속에 이성이라고는 무너진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살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윽박지르면서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녀석이 죽은 꼴을 어떻게 상상할 수가 있어.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신경질적으로 벽을 쳐댔다. 손바닥과 손등의 냄새는 썩 좋질 않았다. 피, 수도 없이도 본 것인데, 왜, 손바닥에는 여전히 그 녀석의 피 냄새가 가득했다. 손을 말아 주먹을 꾹 쥐었다. 어떻게든. 살 녀석이다. 어떻게든.
실수다. 완벽한 실수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모두 제 탓인 듯 했다.
제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회사의 사람이 들었는지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제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 꽤나 오래 회사에서 일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은 꽤나 단조로웠다. 벌벌 손바닥을 떨면서 서있는 저에 비해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되겠죠. 알베르토 로라스 경은 회사의 에이스가 아닙니까? 자랑스러운 사람이죠. 그러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이상한 말이로군, 녀석이 에이스이긴 했었나. 그냥 녀석은 알베르토 로라스 이었는데 말이지.”
그래, 그는 그저 알베르토 로라스다. 어떤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말하는 이름은 알베르토 로라스 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저는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어떤 일이 있었던, 무슨 일이 있었던 그는 그저 그 임에 불과 했는데 말이다.
“그가 눈을 뜰 수는 있을까.”
“아마도, 뜨겠죠. 그는 강한 사람이니까요. 그건 친우이자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그랬던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라, 좋은 답이야.”
그 답에 조금은 후련해진 듯 했다. 녀석이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제야 떨어트린 창을 손에 쥐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저를 더 전투에 바로 임하라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이 떨림이 저를 만족시킬 것이라는 것을 저는 알기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편에 떨어진 녀석의 창이, 그 창이 외로이 있다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이 기분이 묘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녀석은 분명, 평소와 같을 것이다. 그렇게 제 스스로를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맞아. 녀석은 분명, 저와 함께해온 시간들처럼 어떠한 부상을 가져도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저는 이리도 안일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헛웃음을 치면서 그는 몸을 다시 돌렸다. 그가 다시 돌아 올 것을 안다. 아직 그는 제 답을 듣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 답을 들을 생각을 한다면, 녀석은 다시 돌아와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리도 걱정을 하면서도, 그 앞에서는 아닌 척,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척 굴었다. 사실은 진정으로 누구를 이렇게 걱정 하는 일은 드물면서 말이다. 한숨을 쉬어댔다. 쉬어댄 한숨이 호흡이 되어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제가 하는 것은 그것 뿐 이었다. 호흡을 천천히 하면서 그가 빈자리를 제가 완벽하게 쥐고 흔드는 일, 그 일을 제가 할 수 있기에, 제 등이 천천히 무거워졌다. 내가 녀석의 자릴 채울 수 있을까? 그 일은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돌아와야 했다. 녀석이 돌아와서 저를 잡아주어야만 했다.
이리도 의지를 해대니, 그를 밀어낼 수밖에, 단 한번도, 단 순간도 이런 적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녀석을 지나치게 의식 하지 않았던가, 제가 너무 나도 한심하게 그걸 알고 있었다, 저에게 말하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저는 괴롭게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녀석을 천천히 피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갑자기 하는 것은 반칙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던가,
‘자네를 연모해.’
굵은 단어가 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애써 외면했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거절의 대답과도 비슷한 말을 했었던 그 순간들이, 그렇게 겹쳤다. 일부러 회피했던 제가 너무나도 우스웠다. 격한 전투가 끝나길 빌었다. 전투가 끝나길 부디 빌었다. 이 기나긴 전투가 끝이 나야, 지독하게 제 머리를 괴롭히던 생각들이 멈출 것이다. 착잡하게 생각을 멈추었다. 이런 생각을 뭣 하러 하나, 땀에 절인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멈춰진 전투 앞에 서있었다.
멈춰져버린 시간 앞에서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그저 아무 일도 없이,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입술에 담배를 입에 무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그 것 뿐이었다. 돌아오길 바랄 뿐이었다. 그게 전부 다. 지금은.
****
그가 당연히 눈을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언제나 그런 부상들은 당연히 있었고, 그리고 그 부상을 해결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녀석일 텐데, 아직까지도 눈을 뜨지 못한단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뭐라고?”
“그가 돌아오지도 못할 수도 있단 소리야.”
“하, 녀석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그럴 수도 있단 소리지, 뭐 이리 흥분을 하고 있어?”
“…이상하게, 불안해. 지금 쯤 이라면 괜찮다고 하면서 내 눈 앞에 있어야 했어.”
“이상하게 민감하게 굴고 있네. 다리오.”
“닥쳐.”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꽤나 영 기분이 좋지 않은 태도에 그녀는 그만 두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그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는 그녀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불안증세가 꽤나 심해져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는 꽤나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는 일에 대해서 말이다. 어쩔 수 없겠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와 그의 관계는 그녀가 관여할 수 없는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 가장 컸다.
“그의 가문에서도 연락이 와버렸어.”
“그건 굉장히, 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그렇겠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잖아.”
“골치 아프군, 또 다시 그 집 사람들과 말을 나누어보라는 건가.”
“당신 외에는 이야기가 통하질 않다는 것 알잖아.”
“빌어먹을, 알고 있는 걸로 하겠어.”
골치가 아픈 이들이었는데, 저는 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잔뜩 경직하게 되었다. 또 다시 그 사람들과 마주해야하는 것인가. 대단한 치맛자락, 아니 대단한 입이다. 얼마나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라고. 제 자리에 앉아서 몸을 기댔다. 생각이 또 다시 복잡해졌다.
그가 당연히 깨어날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랬는데 말이다. 한심하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뜰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불안하게도 생각이 그러하지 않았다. 생각은 언제나 다르지 않았던가. 그 생각이 무색하게 그는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숨만 쉬고 있었을 뿐 아무 것도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알베르토 로라스일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뺨이 따뜻하게 온기를 유지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살아 있었다. 온 몸으로 제가 살아 있다고 외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제 눈으로 바로 보지 않았던가. 조금씩 꿈틀거리는 손가락에 그가 곧 깨어 날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을 하지 않았던가, 그는 곧 눈을 뜰 것이다. 그것을 저는 의심치 않는다.
눈을 꾹 감고, 머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그와 했던 말을 뿐이었다. 그래, 물론 네가 날 좋아할 수도 있겠지, 그랬겠지. 그랬었겠지. 무겁게 제 머리를 헤집어댔다. 그래서 그 후에는. 내가 널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애석하게도 그건 또 아니었다.
제 생각은, 그래, 아마도 제 생각은 그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가장 큰 두려움, 이 두려움이 너무나도 커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에, 어느 순간에 제 앞에서 보이던 녀석이 저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보고 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었다.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제가 바라고 싶었던 것은, 그래, 제가 바라고 싶었던 것은 단지, 그저, 옆에 있어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래 어쩌면 이기적일 지도 모른다. 제 감정만을 추구해버린 것 아닌가.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제가 바란 것은 제 인생에 아무 일 없이, 그가 저와 함께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다른 것이길 바랬다. 친우. 그와 저를 지칭하는 단어는 단 하나에 불과 했다. ‘친우’ 그 단어 속에 저는 옭매이고 그 것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 것이 이기적이다. 한없이 이기적이질 않은가? 어이가 없지. 저는 이리도 이기적인데, 이런 감정이라도 얻고 싶은 건지. 그에게 오히려 더 미안해질 뿐이었다. 이런 저는,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서 그의 질문의 답을 애매하게 주었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혹시라도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그러지 않았을 텐데, 손가락을 담배 불에 데여버렸다. 그가 데여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두려울 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불길한 불안감이 저를 엄습해 오기 시작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나 더 길어져야하는 걸까. 도무지 알 틈이 없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그의 가문에서 벌써부터 사람을 불러 회사를 들쑤시고 있었다.
“무슨 짓인가.”
“자네인가. 아직 까지도 붙어있었나.”
“…말이 많군,”
그렇게 대하자 그들도 여전히 냉소적인 태도였다. 빌어먹을, 욕이 제 입에서 튀어 나왔다. 잇새에서 튀어나온 욕설은 입을 벗어나와 공중에 퍼졌다. 잘난 놈들이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그들을 응시했다.
“여전히 천박한 것은 변하지 않는 군,”
“당신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들을 보며 저 또한 냉소적인 태도를 비추었다. 묘한 신경전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알베르토 로라스의 ‘육체’ 이었다. 저는 알고 있다. 그들이 왜 그의 육체만이라도 원하는 건지를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를 비출 수밖에 없겠지. 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존재의 ‘씨’ 만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려온 알베르토 가(家) 의 방법이 아닌가, 그들의 이기적이고도 강한 이들을 만드는 방법. 그 더러운 방법을 사용할 것을 알기에 저는 묵묵하게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날카롭게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를 도구처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알베르토 로라스는, 물건이 아닐 텐데, 너무 물건처럼 대하는 것 아닌가?”
“가장 강한 아이를 얻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 자네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니었나.”
“물론,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고 있지. 알베르토 로라스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일이 재미 있겠군.”
“그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건가? 미련한 자가 따로 없군.”
그 대답에 저는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하고 되물었다. 그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자네가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래서 자네라면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녀석이 깨어나질 않는다니? 단지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었던가.”
“하, 듣지 못했나, 그들의 소견에 의하면 거의 시체나 다름없다고 그러더군, 자세한 소리는 듣지 못했던 건가, 다리오, 자네도 꽤나 무뎌졌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아? 그게 말이 되지 않지 않은가. 헛웃음을 보였다. 그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다. 저는 그들을 응시하며 힘겹게 한자, 한자 뱉어댔다. 그 것이 확실한 지에 대해서, 그 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들어야만 했다. 저는, 그 것을 알기에는 그와는 가깝지만, 가까이 갈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가. 우스워라.
“글쎄, 그건 잘난 자네가 알아보는 것은 어떤가? 언제나 그의 보호자처럼 굴지 않았던가.”
욕들이 목구멍에서 걸려 나오지 못했다.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못했던 제가 한심해져버렸다. 한심하다. 알 수가 있나.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에게 주워들은 말들이 전부이었다. 답답함에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가 떼어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점처럼 사라지고 나서야 저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데려가려고 하는 것을 왜 인지 몰라도 몸이 막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온몸이 멈추어버린 이 감각은, 마치, 그래 마치 전장에서 홀로 서있는 소년과 같지 않은가.
“아니, 녀석을 일어 날 거야.”
“어찌 그리 확신하는 가, 자네가 뭐라고.”
“내 확신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그럼 그 잘난 주둥아리 말고, 결과를 내놓아보게, 자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결과 말 일세.”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을 노려본다. 그래, 제가 그리도 좋아하는 결과를 내놓으면 되는 일인가. 중얼거리면서 꽉 다물던 입을 열어 저는 수긍의 답을 내비추었다. 그래, 그렇게 해보지.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통보 아닌 통보를 해놓고 나서야 온 몸의 힘이 풀렸다. 그건 사실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제 자존심을 내비추지 않았는가. 이게 무엇이라고, 이 작은 자존심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과연 눈을 뜰까? 그들이 말하는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죽은 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저는 그것에 대해서 울컥했을 지도 모른다.
울컥, 울컥했던 감정이 결국은 이러한 일을 만들지 않았던가, 하, 한숨과 웃음이 터진 목소리가 터졌다. 왜 도무지 울컥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를 ‘죽은 자’ 로 취급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던가, 이리도 살아있다면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를 두고 말이다.
모두 떠나가 버린 그 자리, 고요한 작은 공간 속에서 하염없이 누워 옅은 숨만 쉬고 있는 녀석의 말라버린 손을 제 손에 움켜쥐었다. 이렇게 나약했던 사람이었던가, 얇은 숨소리가 손가락에 닿았다. 그래, 이 작은 숨소리를 두고 어떻게 그가 이미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아니, 당연하게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을 떠라, 알베르토, 아직 내 답을 듣지 못하지 않았던가.”
중얼거리면서 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여댔다. 들렸다면 지금이라면, 그래 지금이라면 눈을 뜨고 눈이 시린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 그의 얼굴을 매만져보았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랬었던 것 같은데, 잠시 못 본 사이에 얼굴이 꽤나 핼쑥해져있었다. 잠깐 보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말이다. 죽음이, 저만 모르는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만 같아 괜히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했다.
아,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
녀석이 눈을 뜨지 않은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의 상태에 들은 것이라고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죽어버린 것이라고 그들도 그들과 같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어떻게든 살리라고 그러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말, 그런 말만 하지 말고,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녀석이 왜 깨어나지 않아.”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리오 경, 그는 이미 죽어버린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하, 그런 같지 않은 말을 듣자고 하는 소리가 아닐 텐데.”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깨어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말이죠.”
당신은 전부 알고 있잖아요. 그 대답에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그래,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저였다. 안다.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는 깨어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저를 목 조르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재촉하고 있는 것, 아닌가.”
힘겹게 한 자 한자 뱉어 댔다. 알고 있음에, 그 불안감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되어버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어떻게 되는 것이라, 그래, 우선은 가장 큰 공백이 생겨버리겠지. 그 커다란 공백이 말이다. 그 공백에 허우적거리는 건 또 다시 제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차라리, 그래 차라리 아무도 제 곁에 없는 것이 나았다. 이리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저 또한 입을 다물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어날 확률이 전혀 없나.”
“확률이라, 아마도 있다면 거의 0.01%에 가깝죠. 그것도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겠죠.”
“더럽게도 확고하군.”
“말하자면, 시체를 두고 살리라고 하는 다리오경의 억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확고하군, 그렇다면 나는 0.01%의 확률에 걸면 되는 건가.”
“당신이 그렇게 바란다면, 아마도, 제가 유추하건데, 그는 단지 기나긴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 잠이 다만, 기약 없을 뿐이죠.”
더럽게도 긴 잠이군, 중얼거렸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저를 이리도 한심하게 만들어버리는가. 언제부터 이리도 나약했다고. 알았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모두 물러난 자리에서 그의 얼굴을 내려 볼 뿐이었다. 그가 죽었다고 단정 짓기에는, 그렇게 말 할 수 없는 하나의 당연한 근거 하나가 있었다. 자라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 그리고 그 피부에 전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수염까지 하나하나가 제가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 근원처럼 보였다. 생명의 시작처럼 되어보였다. 이런 녀석이 죽어있는 상태라고? 이미 그가 죽어버린 상태라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저는 여기 살아 있다고 온몸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 알베르토 로라스 이 멍청한 녀석아.
“차라리, 그래, 차라리 눈을 떠, 이 미련한 녀석아. 그것으로만 말하려고 하지 말고, 이, 멍청한 녀석아.”
터져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울컥했던 울분의 주머니가 터져버려 그에게 말해댔다. 왜, 네 몸은 말하고 있으면서, 왜, 라는 심정일 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것 같았던 울분의 주머니는 쉽게도 터져 말라버린 손을 붙잡고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 그래 차라리 죄책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이렇게 그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릴 이유가 없었다. 제가 그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그에게 이리도 헌신적으로 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 차라리 죄책감이 맞겠어. 차라리 죄책감이 맞을 지도 몰라. 그것이 아니라면, 말라버린 이 얼굴에 숭고한 입맞춤을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캄캄해진 어두운 방 속에 홀로 남아있는 그가 안쓰러워 그 자리에 가벼운 불빛을 두고 문을 닫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일 뿐이었다. 다시 눈을 뜰 거야. 녀석은. 분명. 이렇게 생각만 늘어가 버렸다. 처음의 한 달, 그리고 반 년, 그리고 한 해 까지는 언젠가는 눈을 뜰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녀석은 나약하지 않고 강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에, 버틴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 아닐까. 저는 한숨을 쉬어댔다. 제가 바랐던 불빛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른 것이라고는, 고작 제 입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뿐이었다. 제가 바란 엔딩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담배의 끝이 타들어가서 손가락 끝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뜨거운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다 피워댄 담배는 내려놓으라며 아우성을 부리고 있었다. 바닥에 거의 사라진 담배를 떨어트려 구두 굽으로 불을 꺼트렸다.
오늘도 녀석을 보러 온 날이었다. 까칠한 머리를 애써 단정하게 만드는 척 몇 번을 머리를 매만지고 문을 열었다. 숨 막히게 고요한 그 자리에 들어선다.
아, 역시, 오늘도 눈을 뜨지 않았구나.
두 번째 장.
시간은 빠르게 지나 있었다. 길어야 일 년, 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삼년이란 시간이 지나있었다. 변한 것이라, 변한 것이라면 제가 그를 조금씩 포기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변했을 지도 모른다.
처음 첫해는, 어떻게든 깨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맹신하게, 조금이라도 기척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거의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말이다. 이윽고, 두 번째로 해를 맞이한 순간에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 제가 조금 더 잘 만들었더라면 그가 이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수없이 찔러대지 않았나. 그 수없이 찔러대던 자국들은 제 허벅지와 손목에 박혀 머물렀다. 그렇게 해버려도 냉랭하게 눈을 뜨지 않은 것은 그였다. 조금씩 지쳐버린 세 번째의 해에는, 눈을 뜨지 않는 그의 눈을 억지로라도 파서 눈을 뜨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는, 그래 이제는, 어떻더라.
몸을 벤치에 기대어 담배를 무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피우고 그리고 녀석의 얼굴을 한번 보는 것 외에는 그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제 스스로가 가장 먼저 변했을 지도 모른다.
입술 끝에 바짝 닿아 사라진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다시 한 개피를 물었다. 지독하게 배인 담배 향이 저를 안정시켰다. 제가 알던 저는 분명 담배를 피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건만, 어느 순간 이렇게 입에 떨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제가 안정이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있지 않겠는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담배를 애써 입에서 떨어트리려고 했다. 손이 파르르 떨리면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 이 따위의 것에 의지를 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더 이상 제 상태도 챙기지 못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완벽하게 지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다리오, 자네도 가끔은 틀릴 수도 있지. 이런 일은 말이야.’
시끄러워.
‘로라스 녀석은…. 이미’
닥쳐
‘죽어 버린 지….’
닥치라고.
‘오래야.’
지독한 현실의 목소리는 트라우마가 되어 제 머리를 집요하게 찔러댔다. 틀렸다. 제가 틀려버렸다. 그 답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제가 틀렸다니? 그런 일은 없지 않았던가. 이렇게 뛰어난 제가 그럴 리가 있나, 저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깨어나지 않은 이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군가 나와서 해결방안이라도 제시해주었으면 좋았을 마련이다.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이 우스운지, 아무도 해답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늘 그러듯, 저 더러 하라는 것 마냥 아무도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다리오 경.”
“말해.”
“별 차도가 없다는 것,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를 두는 것은 실례일지도 모릅니다.”
“…”
침을 꼴깍하고 집어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 그러는 건가. 그는 물었다. 그 말에 얼어버린 그들은 겨우 손에 쥔 기록을 넘기는 척을 하면서 애써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말해.”
“큼, 말하자면, 이제는, 그를 그만 놓아주자는 말입니다.”
“그게, 소견인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허락했던가?”
“흔쾌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물론 당신의 실패를 비웃어달라고도 덧붙여서.”
빌어먹을 알베르토. 중얼거렸다. 나의 실패? 나의 실패라고,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 대답에 저는 한심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다.”
그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렇게 쉽게 그를 놓아줄 수 있을까?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사라지는 무리에서 저는 다리가 풀려 그를 쳐다보았다.
“나쁜 소릴 듣게 해버렸다. 미안하다. 네 귀를 막아버릴 걸 그랬다.”
미약한 숨소리, 이 숨소리 하나만 보고 이리도 달려오지 않았나. 이 미약한 숨소리, 이것을 믿고 여기까지, 참아 내지 않았던가, 분명, 분명 살아있다. 자라나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제가 섣부른 판단을 해서 깨어날 지도 모르는 그가 죽어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결과가 아니던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깨어날 것이라고 믿는 미련인가, 이런 미련인가.
그를 보면서 한숨을 쉬어댔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하는 일을 준비했다. 말끔하게, 늘 하는 일이었다. 녀석의 수염과 손톱을 정리하는 것은 어느새 제 일이었다. 눈을 뜨면, 네 수염과 손톱은 전부 내가 했다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이토록 간절하게 매달리면서 했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다.
똑똑, 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또렷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별 차도가 없다고 하던데, 아닌가?”
“….”
“듣기로는 당신이 드디어 그를 포기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밖에서는 환자 한명을 치워버린다고 신나하고 있어”
“조용히 해, 녀석이 듣겠어.”
“그는 듣지 못해. 멍청한 사람.”
“알고 있다.”
“왜 이렇게 그에게 매달려, 지금이라도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 하는 거야?”
“골 아프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
“정신 차려. 다리오 드렉슬러. 이건 현실이야. 네가 지금 그를 잡고 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해. 알고 있는 일이라고! 마녀, 제발 당신까지 그런 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도 알아. 내가 당장이라도 복귀해야하는 일도 알고 전부 다 알아, 그런데, 그러다가 녀석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녀석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그 말을 제일 먼저 해주어야 속이 편하다고, 그렇게 될 것 같다고.”
“…알고 있으면, 정신이나 차려, 다리오 드렉슬러.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이렇게 굴 시간에 회사를 지킬 생각이나 하라고.”
회사, 그래 회사를 지킬 생각도 해야지.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댔다. 티격태격했던 그녀 또한 어느 순간 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회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라는 말. 당신은 아직까지 필요하다는 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으론, 왜? 내가 이를 두고 가야하는가, 이면적인 생각마저도 들어버렸다. 없어도 되는 일, 아닌가? 비릿한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그를 쳐다본다. 너는, 너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알베르토, 도저히 모르겠다. 중얼거렸다.
“이만 가보는 걸로 한다, 내일, 그래. 내일 보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넘겨주었다. 생각해보겠다는 말. 네 목숨을 가지고 왈가왈부한 제 탓이 아닌가. 또 다시 끊임없이 나락 속으로 빠져버린다. 끝없이,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너는 살 것이다. 언제나 되 뇌이면서 말하던 말들은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나도 지쳐버렸어. 이제는. 쏟아진 말들 위로 큰 글자가 품어진다.
지쳐버렸어. 그 단어는 제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며 숨길 수도 없었다. 이미 지쳐버렸다. 충분히 지쳤어. 지금까지 그를 생각한 시간들,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기억들이. 지쳐버린 생각들을 고치려고 하는 것 마냥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었다. 그뿐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초조하게 눈을 뜨길 바라면서 기다린 시간들은, 지나면 지날수록 제 목을 조르고 있었다. 피폐해진 제 정신은, 이미 되돌아올 수 없었다.
내일? 내일 보자라는 말은 아마도 없을 지도 모른다. 괜히, 현실 앞에서 망설이는 것일 테니까. 내일, 내일이면 너는 영원한 어둠 안으로 갈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저와 그 뿐일 것 같은 그 공간 속에서 나와 현실 앞으로 몸을 돌렸다. 쾌쾌한 냄새에 그제야 지독한 현실임을 깨달았다. 이 현실이 얼마나 지독하더라, 고개를 저었다. 겨우 병원의 냄새를 내버려두었다. 그 현실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발걸음을 향해 옮긴 곳은 싸구려 향수를 잔뜩 묻힌 곳이었다.
****
아파요. 중얼거리는 여성의 허벅지를 때려댔다. 그제야 그녀는 허벅지를 더 벌려서 저를 맞이한다. 오늘,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움직여댔다. 무슨 일이라, 무슨 일이라고 하면, 일이 있었지. 후둑 떨어지는 땀방울과 질척하게 묻어 나오는 액체들을 무시한 채로 그 자리를 피했다.
“팁까지 줬다.”
탁자위에 둔탁하게 올려둔 돈을 보라는 것처럼 그녀에게 명령했다. 그녀는 명령하지 말아요. 하며 저를 노려보았다. 그런 태도, 돈을 주고 네 몸을 산 사람에게 할 말인가? 입술을 꾹 깨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 그녀에게 지폐 한 장을 더 탁자 위에 두었다. 원래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또박 또박 어떻게든 말하는 그녀가 그랬다. 원래? 원래는 어땠는데. 지독하게 짙은 향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원랜, 이렇게 감정적이질 않았잖아요.”
감정적? 그랬던가. 하고 저는 그제야 그 품에서 빠져 나왔다. 소식이, 너무 나도 큰 건가. 그는 중얼거렸다. 어떤 말을 자꾸 붙이려는 그녀를 밀어내고는 간다.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천박한 향. 천박한 자리. 그 장소가, 불쾌하게 제 몸을 쓸어대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분이 나빴다. 왜? 왜 나쁜 건데?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게 얼마만이더라. 관계로도 풀리질 않는 기분이었다. 지금 부족한 것이 육욕도 아냐? 아이러니하긴, 이런 일 드물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얼마 만에 하는 건지, 한 번 피웠다고 제 손에서 부드럽게 착 감기는 담배를 다시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하자 칙칙 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짜증을 내면서 몇 번 탁탁 거리다가 포기한 듯이 담배를 물기만 했다. 질척거리는 침 냄새가 담배에 묻었다.
현실에 수긍해버린 것이 얼마나도 더러운가, 그의 모습을 외면한 후에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이런 일이 아닌가. 이제는 놓아야하는 시간이 맞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꼴이 아닌가. 회사 앞을 몇 번이고 서성이다가 결국 다시 돌아왔다. 까칠해진 얼굴을 들고 회사 앞에 서자 경계의 태도가 저를 반겼다. 얼굴을 몇 번 보여주고 나서야 그들은 저를 회사 안으로 인도했다.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잠시 온 것뿐이야. 녀석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을 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를 바라보았다. 그 올곧은 시선을 피해 저는 몸을 돌려 가장 익숙한 자리로 돌아섰다. 제 자리에 남겨져있는 익숙한 먼지 쌓인 장비들을 보고 나서야 그동안 멀리 있었던 것들이 한 걸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와 함께 한 것들이었다. 그것을 손에 들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돌아올 거지?”
“…그를 보내주고 나서라면.”
“그거면 됐어.”
흡족한 미소를 내비 춘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당연하게 굴지? 그는 회사의 에이스가 아니었나.”
“이미, 그가 그렇게 되어버린 순간부터, 여러 수를 생각해 둔 것 뿐.”
“지독하게 현실적이로군, 마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너지는 건 우리가 될 테니까.”
“우리?”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제가 물었다. 그녀는 또렷한 눈동자로 우리. 라고 대답했다. 녀석이 쓰러진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이스의 빈자리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두 사람이나 빠져버린 수를 어떻게든 생각해둔 그녀의 명확한 생각은 현재가 되어있었다.
“더럽게도 추상적이군.”
머쓱함에 괜히 그리 대답했다. 제 손에 쥔 것을 그녀는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
“잘 보내주고, 다시 돌아오길 바랄게.”
“그렇게 해야겠지.”
“그래야만 해.”
“알아.”
그래야지. 되 뇌이면서 다시 몸을 돌렸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저에게로 시선을 거두었다. 조각난 투구를 품에 안고 있는 제 꼴은, 아마도, 그녀의 생각에는 피해주어야 할 것이 맞았을 지도 모른다.
‘자네는, 나를 … 아닐세.’
‘싱겁게. 또 어떤 소릴 하려는 거냐, 알베르토’
‘별 다른 소리는 아닐세. 그저, 그저…’
‘말 질질 끌지 마라. 새끼야.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인가. 귀가 먹먹한 것 같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말게나, 그런 소릴 듣는 나는 어떠겠나, 가슴이 무거워진다네.’
‘알았다. 쓸데없이 걱정하긴.’
‘진심일세.’
‘넌 쓸데없이 진중해’
‘자네는 쓸데없이 가볍고.’
‘시답지 않은 농담하긴’
‘이 번 전투가 끝나면 할 말이 있어, 부디 들어주길 바라겠네.’
‘알았다. 무사히 보자고.’
‘이번에는 피할 생각하지 말게나.’
피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면서 저를 어르던 사람이었다. 애매한 답을 주었던 제가 무색하게, 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제 손으로 보내주어야 한다는 이 생각들이 저를 더럽게도 무겁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어떻게, 하나 뿐인 사람이 아니었던가. 조각난 투구를 제 품에 가두다시피 안고 저는 툭툭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액체를 떨어트려댔다. 기억이 엉킨 것 마냥 머릿속에서 그 녀석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필름이 끊겨 엉켜버린 것 마냥 회로를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원히 친구인 건가.’
‘자네가 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네.’
한참을 얼굴을 부서진 투구에 묻고 눈물을 흘려댔다. 그제야 끝이 났다. 우물쭈물 생각해댔던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옳게 만들었다. 아니, 내가 원하던 답은 이것이 아니었어. 저는 멍청하게 서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걷지 못했다. 그 길을 같이 걷길 바란 것은 너였단 말이다. 알베르토 로라스.
고개를 박고 생각에 빠져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깨달아도, 변하지 않는 것은 저를 지겹도록 바라보는 현실들이었다. 현실들은 그를 이제 그만 놓아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이 꿈들만큼은, 조금만 더 그를 지켜보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아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아닌가. 무엇을 그리도 어려워하는 것이냐, 그저 목을 쥐고 끝나는 일임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간단한 이 일을, 왜 이리 어려워하는지, 저는 알 수 없었다. 그 일을 하기에는, 담고 있는 감정의 깊이가 너무나도 컸다.
****
“드디어 결정하신 겁니까?”
“그렇게 좋아할 필요가 있나.”
꽤나, 콱 막힌 목소리이었다. 남자는 드렉슬러의 심기가 꽤나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의 태도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그의 눈치를 어느 정도 보았다. 잠시 헬리오스에 다녀오겠다던 그의 손에는 부수어져버린 알 수 없는 철조가리가 함께 손에 들려있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은, 드렉슬러의 표정이 매우 괴로워 보여 아무런 말을 하지 않도록 결심했다.
“그럼, 알베르토 로라스의 안락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그건 내가 하도록 하지. 단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나.”
“예, 그렇게 하십시오. 이 약을 투여하면 모두 끝입니다. 드디어 그도 자유로워지겠군요.”
“자유라. 그런 자유라.”
드렉슬러의 눈빛에 슬픔이 잠시 어렸다가 사라진 것을 본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가장 친하던 친우다보니 그런 거겠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약물을 그에게 넘겼다. 약물을 손에 쥔 드렉슬러의 표정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저를 내보내자 그는 병실의 작은 창문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가련한 사람이었다. 저 남자 또한. 다리오 드렉슬러 라는 남자는 큰 갑옷을 입고 있지만은 여전히 작은 소년이었다. 고개를 젓고는 그들만의 시간을 내어주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은 빠르게 움직이기 마련이지 않나, 다리오 드렉슬러의 눈물을 은근슬쩍 보아버린 것 같아 괜한 것을 내밀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시체, 그 뛰어난 알베르토의 신체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은 의사인 자신에게 있어서 영광이 될 것이다. 그 것 때문에 그에게 이리도 무책임하게 굴었겠지. 저는, 위선자가 아닌가. 몸을 돌려 순진한 척 쓴 안경을 내려두었다.
****
“내가 왜 이걸 가져 왔는지 모르겠다. 로라스.”
그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다만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울컥, 어렵게 정리한 것들이 무색하게 그는 숨을 쉬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키고 영롱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듯 했다. 제 손에 쥔 것이 너무나도 손이 시리다. 이 약물이면 그는 영원히 끝이 아니던가, 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전부 뿐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아. 알아서 듣고 싶지 않았다.”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애써 덤덤한 것은 제 쪽이었다. 푹 한숨을 쉬면서 제 손에 쥔 시리고도 차가운 액체의 주사를 그의 팔에 꽂으려고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그의 죽음을 안내하려는 듯 굴었다.
“네가 내 답을 기대하고 있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결국 놓질 못해 주사를 옆에 두었다. 부수어진 투구를 그의 옆자리에 두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라스, 네가 옳았다. 내가 틀린 것이었다.”
마른 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 줄기가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네가 옳았다.
“내가 틀렸어. 내가. 아무 것도 모른 건 네가 아니라 나였단 말이다.”
틀렸다. 제가 틀림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련한 녀석, 미련한 건 저였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를 보낼 시간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입니까?”
“재촉 하지 마.”
“대신 할까요?”
“네 놈한테 내 친우를 맡길 이유는 없다.”
“친우? 친우 치고는 꽤나 절절하십니다. 저는 그럼 퇴근 할 테니, 당신이 끝을 보세요.”
끝? 끝을 보라니, 저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었다. 무거운 한숨이었다. 한 낮이었던 시간이 어느 순간 색들이 변해 노을을 지나, 캄캄한 어둠이 되었다. 녀석은 아직까지도 옅은 숨을 쉬고 있었다. 시계의 소리는 점차 커졌고 저는 그 시린 주사를 손에 쥐었다.
‘내 마지막은, 자네가, 꼭 봐주었으면 해.’
‘별 시답지 않는 소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럴 일이 생긴다면 말일세, 혹여나 죽는다면, 만약, 다른 무슨 일로 인해서 죽게 된다면, 기왕이면 자네의 손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네.’
그건 궤변이다 알베르토 로라스, 이런 일을 나에게 시키는 것은 옳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푹 한숨을 쉬면서 손에 쥔 주사를 그의 팔목에 대고 주사를 꽂았다. 마지막을 고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여전히 온기가 남은 눈두덩이 위, 뺨, 코에 숭고하게 입맞춤을 해댔다. 마지막, 인사라도 남기는 듯이 말이다.
“내 답은, 듣고 싶지 않았나. 내 답은, 그러니 내 답은.”
주사를 천천히 놓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 제 손을 타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몸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저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나 또한, 네 곁에 서고 싶었다.”
천천히, 온기가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그새 따뜻했던 온기가 그의 눈동자처럼 시리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네가 말하던 것이겠지.”
온기를 잃은 얼굴을 저는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다시 만나자. 알베르토 로라스.”
처음부터 눈을 감고 있었던 그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숨을 조금씩 끊어댔다. 조금의 살기 위한 버둥거림조차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제 손으로 보냈다.
끝까지, 저는 끝까지 비겁하게 말 하지 않았다. 확실한 말을 하는 것은, 네가 눈을 뚠 순간이길, 그러길 바랐다.
“난, 네가, 눈을 뜰 줄 알았다. 진심으로.”
너를 기다렸어. 진심으로. 들리지도 않겠지만 중얼거리면서 사라져가는 생기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사라지고 있는 입술에, 입술을 맞춰댔다.
단, 하루, 붙잡고 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녀석을 놓는 시간은, 24시간이면, 충분했다. 더 이상 숨을 쉬질 않는 몸을 껴안고 숨을 쉬는 것을 잊은 듯, 쏟아내고 퍼부었다.
나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었다.
세 번째 장.
“경! 빨리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잠시 발작을 했단 소식이었다. 다급하게 몸을 돌려서 그 쪽으로 뛰어 나섰다. 잠시 발작이라니? 확인을 해야 할 것 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전히 죽은 듯이 숨을 쉬고 있는 그가 있었다.
“얼마나 되었나?”
“약, 한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그거 참, 큰일이로군.”
발작을 일으켰다는 말이 사실답게 그의 몸에는 약간의 땀이 배어 있었다. 후 하고 긴장감이 모두 풀려버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것인가, 여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을 뜨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가 이리도 무너지고 있질 않은가, 그가 보면 박장대소할 꼴이었다.
“그만 가보게나, 여긴 내가 있을 테니.”
“가보겠습니다.”
의자에 몸을 기대어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저는 오로지 위만을 보고 있었으니까.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그에게 이런 일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초조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언제 일어날 생각인가, 나의 태양. 중얼거리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숭고한 자유, 그는 저에게 있어서 숭고한 자유의 여신과도 같은 존재이었다.
‘네가 나를 연모하던, 무엇을 하던 상관하지 않아. 애매모호한 내 대답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알베르토. 내 답은.’
그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가 말하는 대답 따위는 듣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답? 그런 답 따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그만, 그 소리는, 다음에, 다음에 듣게 해주게나. 아직은, 아직까진, 듣고 싶지가 않네.’
‘그렇다면, 네가 정말로 그걸 안다면 내 앞에서 끝까지 숨기란 소리다. 그렇게 부탁하는 것이다. 지금.’
‘…지독하게 잔인한 소리군. 알겠네, 자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겠네. 드렉슬러, 나는 그런 것을 바라고 했던 소리가 아냐, 다만, 알아주길 바랐을 뿐’
제 앞에서 숨기라고 말을 하던 그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잔인하게 말을 했다. 그 표정과는 상반되게 말이다. 그는 아마도, 그의 생각이야 훤히 언제나 내려 보고 있었다. 그는 제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저와의 이런 관계 자체 또한, 얼마나 지독하게 싫은 것인지, 온 몸으로 표출해대곤 했다. 그 표독스러운 표정에서는 그것이 언제나 보이고는 했다.
단지, 말하자면, 알아주길 바랐던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 그의 총명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아무도, 살면서 제 눈동자를 보며 이야기를 한 사람은 그 뿐이었다. 단면이 아닌 여러 양면으로 바라본 것도 그 뿐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연심을 품는 것은 틀린 일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났다.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특이해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제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는 해내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저였더라면, 결코 하지 못할 가문을 등을 지고 나와 귀족인 삶을 거의 포기하는 그런 태도, 그 태도는 가히 누가 보아도 충격적이지 않았나, 그는 그 것에 대해서 별 부담감을 가지지 않고는 했다. 오히려 저를 짓누르는 짐이라고 그는 표현하곤 했다.
그것에 대해서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나 다름없지 않았나, 그는 스스로 제 운명을 만들었다면, 저는, 그 운명을 순응하고 있었다. 자유, 그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며 동경했다.
저는 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동경은, 머리가 크고 천천히 온 몸이 자라나면서 다른 의미의 것이 되어있었다. 그에게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제가 그리도 원하던 ‘자유’가 보였다. 그토록 원했던 자유가 제 눈앞에 있었다. 자유라는 것을 손에 쥐고 싶어 손을 뻗어 본심을 내비추었다. 그러나 저의 자유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제 손바닥을 벗어났다. 벗어난 그는 제 눈을 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바라지 말라는 그 단호한 말. 그 말에 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이라는 그 단어 앞에서 먼저 시작한 것은 저였다. 점점 포기하는 것이 좋나, 그 생각을 품었다. 제 방문 앞에 놓인 답을 읽는다.
‘다음번에 답을 전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귀찮음이 가득했다. 애석하게도 그 답신에 떨린 것은 저였다. 확실한 거절의 답이건, 확실한 승낙의 답이건, 그가 확신을 주겠다는 말은 가슴 떨리게 만들었다. 그는 확고한 사람이었다. 어떠한 대답이건에, 그가 주는 답에 순응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가 저를 위해 약속했던 것들을 바라보았다. 발아래 있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았다. 무게를 줄인 실용성 있는 갑옷, 그것을 그렇게 말하더니, 결국은 성공한 꼴이다. 손바닥으로 그 차가운 금속의 것을 만져댔다, 손바닥에 시리게 남았다. 그의 닫힌 마음처럼 시린 것이었다. 그것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음 공성 때 사용하겠노라 마음먹었다.
그에게 있어서 저는 무엇일까,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낸 사이? 아마 그 정도가 되겠지. 너무나도 확실한 그의 입장이었다. 언젠가, 그 벽을 넘어 함께 할 시간은 올 것인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듯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의 신념과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런 그가, 제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채로 바닥에 널 부러져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침착해야했다. 상처를 확인하니 외상으로 인한 것이었다. 침착하게 창을 두고 장갑을 벗어 상처 부위를 지혈해댔다.
그 사이에 다른 이들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뭘 보고 있나, 어서 들 것 가져 오지 않고 소리를 쳤다. 평소 그럴 일이 없는 그러자 그들은 당황한 듯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중얼거렸다.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피,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불안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 불안감 속에서도 제가 이리도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일들 쯤은 십년 전 쯤에 있던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엔 그는 이것 보다 더 한 상처를 가슴에 품고 있기도 했었다. 제 손에 스며드는 피를 보고 있었다. 뜨겁게 흘려대는 피였다. 아직은 괜찮은 듯 했다. 그의 얼굴을 내려 보다가 몸을 들어 올렸다. 갑옷 때문에 무거웠지만 들 것에 옮기기엔 충분한 거리라고 파악했다.
“괜찮으십니까?”
“별일 아닐세, 이정도 일이야 다분 했는걸.”
손바닥에 짙게 묻은 핏 자국을 씻어내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그 것에 대해서 별 신경을 쓰지 않는지 다시 제 장갑을 꼈다. 손바닥에 묻은 피가 장갑에 배어들기 시작했다. 이정도야 뭐 있는 일이지. 하고 덤덤하게 그가 이야기하자 당황한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정말 입니까? 들어보니 꽤나 큰 부상이랩니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지.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십 년 전에 죽고도 남았을 걸세.”
“도대체 십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맹신적으로 그를 믿습니까?”
“십년 전의 그는 지금 보다 더, 대단했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던 그 자리에 서있던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선 그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살인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 소년은 첫 살인 후에 정신을 잃던 저보다는 멀쩡히 그 자리에 서서 담담하게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온 몸에 피 철갑을 한 그는 그랬다. 홀로 서있던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남아 있던 저와 비해 성숙한 생각으로 온 생각을 바로 하면서 저를 진정시키며 정신 차리라 어깨를 부여잡으면서 그가 대답했다.
“그 정도면 맹목적인 믿음입니다. 역시 오래 아셔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러겠지, 그게 때로는 독이 되어버리겠지만.”
“독이라뇨?”
“지금도 사실은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맹목적으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독이 되어버렸네.”
덤덤하게 이야기를 했지만은, 사실은 결코 덤덤하지 않다. 이미 속은 놀라버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위험할 것이다. 가느다란 호흡을 제 손이 잡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무엇이건, 살아남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토록 떨리는 손으로 창을 잡을 뿐이었다.
손바닥에 가득 그의 피가 배어 냄새가 도는 듯 했다. 묘한 이 긴장감을 들고 전투를 마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약간은 불안하다. 사실은, 불안했다. 그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이 불안감이 저에게 신호를 날리고 있었다. 안다. 알고 있기에 이리도 덤덤하게 굴고 있는 것이겠지.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마음먹었다.
“경, 정말로 괜찮은 것 맞습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네.”
농담처럼 시작한 오늘의 말이 현실로 되는 듯 했다. 서로의 긴장감을 풀려고 했던 이야기들이 결국 현실이 되어버린 듯 했다. 가만히 입을 열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고 싶었던 입은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네는, 나를 … 아닐세.’
‘싱겁게. 또 어떤 소릴 하려는 거냐, 알베르토’
‘별 다른 소리는 아닐세. 그저, 그저…’
그저, 자네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릴 하고 싶었을 뿐이었지. 미적 거리는 태도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그는 눈을 한껏 찡그렸다. 그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제 고백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가 무색하게도 말이다.
‘말 질질 끌지 마라. 새끼야.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인가. 귀가 먹먹한 것 같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말게나, 그런 소릴 듣는 나는 어떠겠나, 가슴이 무거워진다네.’
‘알았다. 쓸데없이 걱정하긴.’
‘진심일세.’
진심으로 불안감이 엄습해왔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피식 거리면서 제 말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과거의 일과 겹쳐보였는지 한참을 웃어댔다.
‘넌 쓸데없이 진중해’
그건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일세.
‘자네는 쓸데없이 가볍고.’
생각 외로 그는 쓸데없이 가벼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제 말에 그는 꽤나 웃긴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릴 내비추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하긴’
농담이 아닐세, 하고 중얼거리다가 굳게 마음을 먹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수 없이 남아 있었다.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저 알아주길 바랐다. 이런 태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진지하게 제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바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어쩌면, 그래 어쩌면 궤변일 수도 있다.
‘이 번 전투가 끝나면 할 말이 있어, 부디 들어주길 바라겠네.’
‘알았다. 무사히 보자고.’
‘이번에는 피할 생각하지 말게나.’
부디, 피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말아주게나. 속으로 빌었다. 그 빌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다른 이유로 저를 피했다. 그 피함이 결국은 이런 비극이 될 줄 알았던가. 착잡하게 손바닥을 내려 보았다. 장갑에 핏자국이 얼룩지게 남아있었다. 아마도 이 자국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묘하게도 불안해’
그렇게 생각했다. 묘한, 이 불안감이 제 마음을 썩 좋지 않게 했다. 분명, 그는 무사할 텐데 말이다.
****
그가 눈을 뜨지 않는다. 우려했던 일들이 결국 현실로 찾아왔다. 미약하게 숨을 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런 그가 다행히도 괜찮다는 일이 있다면, 언젠가는 깨어 날 수도 있단 확률 아닌 확률이 있다는 점이었다. 덤덤하게 옆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는 깨어날 확률이 있다면, 그 확률에 맞게 기다리면 되는 일 아니었던가.
그는 대답을 준다고 그리 말했다. 그 대답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닌가. 중얼거리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자잘한 타박상이 얼굴에 있었는지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 많은 출혈들은 얼굴에서 나왔던 것이었나, 그날의 전투는 다행히도 성공적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입버릇처럼 작전에서 적기사단을 데리고 가지고 놀던 그는 숨을 천천히 고르게 쉬면서 제 옆에 있었다.
“그는 좀 어때?”
그녀가 물었다.
“곧 깨어나겠지. 그는 강한 사람일세.”
“맹목적인 생각이야, 그 바보 자리가 생각보다 큰데, 당신이 채울 수 있지?”
“당연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조노비치 양, 아쉽지만, 당분간 공백이 클 것 같네. 그를 봐야 마음이 편해.”
“열렬하네.”
그녀가 핀잔을 주듯 대답했다.
“열렬 할 수밖에 없네, 다리오 드렉슬러가 아닌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제 뜻을 상부에 전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나고 간 자리에는 숨 막히게 작은 공간 속에 저와 그 뿐이었다. 그는, 눈을 뜰까? 아마도 곧 뜰 수 있을 것이다. 기약 없는 생각만 하고 있는 제 꼴이 덧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허탈하게 의자에 기대 그를 쳐다보는 일이, 나쁘지는 않았다.
****
“자네, 내 목소리 들리나?”
꿈틀거리는 미간을 보았다. 발작을 또 다시 했다는 소식에 뛰어왔더니 아직 까지도 숨이 가득 찼다. 그가 일어날 징조를 보인다는 소식처럼 보이는 발작에 이렇게 뛰어오는 지도 벌써 3년이 흘러 있었다. 세 번 해가 변하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깨어날 것이라는 소식은 포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맞이해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목표였다.
그의 숨소리가 천천히 격해졌다가 흩어지기를 몇 번, 이번에도 발작인 듯 했다. 보통 발작이 일어나면, 몇 번 하다 잠잠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오묘하게 오늘 따라 이상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꿈틀거리는 미간을 바라보았다. 그 것은 오늘의 제 희망인 듯 했다. 씁쓸함에 후하고 한숨을 쉬다가 발작하는 그를 안고 쉬이, 괜찮네, 아무 일도 없네, 하고 등을 토닥거렸다. 이렇게 하면 그는 곧 다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는 단지 깊은 꿈을 꾸고 있는 것 뿐.’
‘그것을 깨울 수는 없습니까?’
‘환자에게 꿈은 영원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말을 보지 않는 이상은 깨려고 들지 않겠죠. 아마도 그의 꿈을 짐작할 수 없군요.’
‘그렇습니까,’
‘다만, 지금 이리도 발작하는 것을 보아, 꿈의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언제나 늘 제 별을 찾아 방랑하는 것을 꿈꾸었다. 그가 꾸는 꿈속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는 별을 찾았을까, 평온한 숨소리가 제 귀에 닿았다. 이제, 그만 눈을 떠주었으면 좋으련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네. 드렉슬러. 이제 그만 그것을 들어주어야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은 많이 있었다.
“자네가 실수 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꽤나 기다리는 일을 잘한다는 것일세, 이정도 쯤이야 나에게는 우숩네. 그러니….”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라는 인사가 조금씩 길어졌다. 숨을 고요히 쉬는 남자를 바라보며 저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꿈에서 깨길 바라겠네. 나의 드렉슬러.”
그리고, 나의 자유. 문을 닫고 병실을 나왔다, 괜히 귀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눈을 떠주지 않을까, 얼마나 기나긴 꿈이기에, 저를 이리도 힘들게 만드는지는 모른다.
나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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