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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 알베르토.”
“고맙소.”
알베르토 로라스 라는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했지만 이내 그는 그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어찌, 그가 그를 찾을 수 있을까,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가 무겁게 느껴지고 말았다. 그의 팔에 감기는 따뜻한 온기에 미소를 겨우 얼굴에 미소를 억지로 짓고야 만다.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몸이 좋지 않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날 아프면 곤란해요. 압니다. 그녀는 그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그가 대답했다. 사실은 좋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의 레이디였다. 그에게 있어 단 하나 뿐인 레이디였다. 그도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결국 정치적으로 이용된 하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수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에는 그의 아버지의 입김이 크긴 컸지만은, 그는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겹게 짙은 그의 감정에 도망친 멍청한 행동이었다.
혹시 찾는 분이 그 분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글쎄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내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레이디는 웃음을 머금고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그녀는 이제 알베르토의 일부분이 된다. 이 반지를 서로 교환하고 서로의 손가락에 족쇄처럼 서로를 잡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하객들을 쭉 살펴보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오지 않은 건가, 아니 올수가 없을 테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에게 하지 말았어야할 짓을 해버렸다.
감정이 잘못된 것인가? 그에게 있어서 그는 동경의 존재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며 주위 신경을 쓰지 않는 자유와 같은 그런 존재이었다. 그런 그 남자는 어느새 전장을 함께 다니며 동료보다 더 짙은 친우의 존재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잘못될 줄이야. 천천히 깊숙하게 파고들었던 감정의 골은 천천히 그를 침식해버렸다. 메마르게 보였던 그의 눈동자는 사실은 누구보다 또렷한 눈동자이었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임을 알아차렸을 때, 얼마나 나약해지던가. 그는 그의 틈을 결국 흩트리고 말았다. 자그마한 그 틈새를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는 그 것을 아는지, 그를 천천히 멀리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군것은 자신이 맞을 것이었다. 결국 그에게 비수를 내리 꽂아버렸다. 청첩장이라는 명분으로 보지 못했던 이를 보고 싶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눈앞이 점점 캄캄해졌다. 누구의 숨소리인지도 모를 만큼.
“정말로 괜찮아요?”
옆에서 그녀가 물었다. 아니. 그가 대답했다. 화려하게 입은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투명한 피부, 그리고 또렷한 푸른빛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것은 곧은 저 눈동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묘하게 그의 눈동자를 닮아있었으니까, 품속으로 따뜻한 온기와 옅은 꽃향기가 들어왔다. 그녀는 영리한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이리 구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을 겨우 내린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의 장식을 다시 올려주었다. 푸른빛의 눈동자,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평범한 그 아낙은 그의 레이디이자, 곧 그의 아내가 될 여자이었다. 그녀는 피로연에는 혼자 나갈까요? 라며 그의 눈치를 살피었다. 그는 당신 혼자 나가면 어떤 말을 듣겠습니까? 같이 가도록 해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나가는 것을 택하였다.
이 결혼 또한 그의 가문이 일방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알베르토는 그 상황에서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던 알베르토를 무시한 채로 일사천리로 결혼은 진행되었다. 그는 회사의 에이스이자 뛰어난 귀족가의 자식이었으며, 어느 하나 흠집하나 없는 귀족가의 남성이었다. 다만, 그가 여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알베르토의 오랜 레이디를 그에게 결혼상대로 제시했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를 알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젓지 않았고, 그녀 또한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그녀와 약혼을 진행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좋아,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식은땀을 흘리는 건지 그녀는 연신 땀을 닦아내주었다. 그녀와 그가 나란히 홀 앞으로 나오자 그것이 피로연의 시작임을 알리는 것인지 잔잔하게 음악이 홀을 채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여 한 곡 추시겠습니까? 라며 말했다. 그녀는 네, 좋아요. 그녀의 허리에 팔을 올리고 왈츠의 스텝을 천천히 밟았다. 수백, 수 십 번은 추었던 춤이기에 별 무리 없이 춤을 출 수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는 춤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몸이 정말 좋지 않은 거라면 가서 쉬는 게 어때요? 그는 떨리는 손을 내렸다. 쓰러질 것 같이 구는 그의 모습에 부축을 한 그녀는 사람을 불러 달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청첩장을 보낸 것은 자신이었다. 손에 땀이 가득 찼다. 멍청한 알베르토,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야? 그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답답한 마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가 빤히 바라볼 것을 알고 있었다.
오지 않겠다는 답장을 보낸 건, 누구였는가.
결국은 그는 휴식을 취하는 것을 택했다. 파티는 계속 진행 될 것이며 그녀는 그것을 수행할 것이었다. 쉬겠다고 말을 하고 테라스에 몸을 기대었다. 날이 좋지 않는 것인지 달은 얼굴을 구름에 얼굴을 숨기고 모습을 가렸다.
“파티의 주인공이 이러고 있으면 쓰나?”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그는 몸을 돌렸다. 다리오! 톡 쏘아버릴 만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그는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별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지. 잘 있어라. 그 말을 하러 왔다.”
“어딜, 간다는 건가.”
“글쎄 어디 론가로 가겠지. 네가 없는 곳으로.”
“나 때문이라면, 내가 사라지면 되는 일 아닌가. 내가 자네에게 괜한 소릴 했다는 것을 알아. 렉스.”
“알고 있다면 더 편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나를 피하지는 말아. 부탁이야.”
“너는 늘 그런 식이지.”
그는 그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이내 받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그를 스쳐지나 나섰다. 알베르토는 그를 전혀 잡지 않았다. 잡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풀린 다리 때문에 테라스에 무너지듯 서있는 것이 전부이었다. 그가 결국은 떠난다는 말이, 그의 가슴을 찌르고 눈을 찔렀다. 하하. 의도치 않는 웃음소리와 천천히 떨어지는 눈물, 그것을 누르고 있는 미련한 손바닥이 전부이었다.
드렉슬러, 그 남자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은 도대체 언제인 것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를 원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은 그라는 것 뿐 이었다. 정말이지 미련한 짓을 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기에 떠나겠다는 그를 전혀 말릴 수 없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애써 잠긴 목소리를 풀며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한숨소리가 들리고 이내 멀리 사라져가는 구두소리가 그가 혼자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이리도 한심하게 무너질 줄 알았더라면, 그런 것을 알았더라면 이리도 멍청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리한 여자이었다. 어떤 계산을 할 지 그녀는 이미 머릿속에서 생각해두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대신해서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는 것으로 끝내었다. 이윽고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는 그녀와 그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전혀 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과의 결합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녀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알베르토, 당신과 나는 명분이 필요해요. 함께 하루를 보냈다는 그 명분이 말이죠. 그녀는 대담하게 그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손짓을 따라갈 뿐이다. 그와 그녀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캄캄한 그 어둠 속에서 만큼은.
*****
그가 다시 세 번, 눈을 뜬 세상은 그가 원하던 하늘이 아닌 그가 바라지 않았던 안개가 껴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어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집어 들었다. 점차 시력이 낮아지는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안경을 하나 마련하였다. 예전만큼 글씨가 또렷하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서류를 처리함에 있어서 안경 하나로 충분한 일이었다. 회사를 나온 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가문을 잇는 것이 전부이었고 그는 결국 한 발짝 앞에서 자유라는 이름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스스로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기회가 '그'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그 남자가 그에게 한 번 뿐인 기회를 줄지도 모른단 그런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자유로운 그 남자의 얼굴과 표정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 남자에게 가지 말아 달라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 했다면, 그 남자는 그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영원한 나의 친구에게.’
영원한 친구라. 영원한, 친구, 두 단어를 손으로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미 사라졌고 그가 남긴 것은 이 펜이 전부이다. 이 펜을 쥐고 있으면 어린 시절이 묘하게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두 뺨에 있었던 홍조, 그리고 어쩔 줄 모르던 그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 뚜렷하다. 친구 놈에겐 도대체 뭘 줘야할 지 모르겠다. 그가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뭔데? 별 거 아니다. 네 생일 선물. 선물? 선물이라고 내민 것은 학생의 신분으로 사기 힘든 꽤나 고급스러운 펜이었다. 음각으로 새겨진 그것은 알아볼 수 없게 그의 글씨체로 적혀 있는 말이었다. 무엇이라 적은 건가? 그가 물었다. 글쎄, 그건 네가 나중에 알지 않을까?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윽고 그 단어를 알아볼 수 있었을 때, 눈물을 흘릴 만큼 황홀한 느낌을 받았다. 다리오 드렉슬러라는 사람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의 황홀감이었다.
‘영원한 친구라, 자네가 이런 감성적인 말을 쓸 줄은 몰랐어.’
‘시끄러워. 쫑알쫑알 말이 많아.’
‘부끄럽군.’
‘그 부끄러움은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알베르토.’
‘고맙네.’
‘알면….’
그가 말을 늘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가 물었다.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드렉슬러의 뒷모습을 지나쳤다. 내려두었던 그 펜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펜을 쥐고 결국은 적지 못할 말을 결국 적고야 말았다. 어떤 말을 쓸까 두서없었던 그 말들은 점차 길어지고 길어지더니 그의 편지가 두꺼워져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그는 황급하게 쓰던 편지들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들어와요. 라는 덤덤한 목소리를 가장한 채, 큰 비밀을 책상에 숨기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꽤나 성숙해져있었다. 곧은 눈동자는 점차 그 색을 더 하고 있었다. 아이보리 색의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들어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옆의 꽃을 바꾸는 일이었다.
“서류 정리가 꽤나 길어지네요.”
“아버지가 밀리신 것이 양이 좀 되더군.”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그래야겠소.”
“그리고, 당신 앞으로 편지가 와있어요. 미안해요. 미리 뜯어보아서.”
그녀도 결국 그녀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었다. 그럴 법도 하지. 그녀를 안는 것은 그 날 이외로는 전혀 없었으며, 그녀를 서운하게 내버려둔 것이 그녀의 오해의 골을 만들고 결국은 정부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그녀가 물어보았다. 그 앞에서 그녀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렷하고 짙은 눈빛이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당신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소.
매몰차게 그녀를 내치는 것이 전부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그저 가만히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표정의 변화도 없이 침착한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그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뜯어보았다고 한 편지를 받았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은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간단한 말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엉망인 글씨로 편지지를 한 가득 채워 적혀 있었다.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그저, 한 친우의 편지인 것 같소.”
“아, 혹여 그 분인가요?”
“나가주겠소?”
그녀는 그의 틈을 열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녀는 그것을 아는 것인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편지의 글씨 하나하나를 읽는 것이 그의 전부가 되었다. 연락이 없던 것이 3년이 되었다. 생사조차 알지 못했던 그 남자의 연락이었다. 연구를 하고 있다는 그 남자가 내민 것은 지독하게도 딱딱한 말이 가득한 것이었다. 이 편지조차도 여러 사람에게 보낸 것들 중에 하나인 듯했다. 그 것에 마음 쓸 이유는 없다.
다만, 그가 살아있다는 신호가 되어준 것이 아닌가? 그가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족한 일이었다. 멍청하게 안도가 되어 몸의 긴장이 풀려버렸다. 헛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어. 그 것 하나로 그는 만족하였다.
*****
“뭐라고?”
그가 그에게 그 감정을 내뱉은 순간은 짙은 와인 향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서로 일에 대해서 빠지던 말은 어느새 흔한 가십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넘어 와버렸다. 술김에, 그래 술을 믿고 그에게 말을 꺼냈다. 아마도, 나는 말이야. 뭐라고? 라고 자꾸만 말하는 드렉슬러의 익살적인 목소리는 그가 완벽하게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취했나? 뭐라고? 난 네 목소리가 안 들려 알베르토!. 취했군. 그가 그리 말하자 그런 것 같다.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드렉슬러가 대답했다. 확연히 탁한 눈동자가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 네 덕에 살았다. 알베르토. 그게 뭐가 대수라고. 그러게 말이다. 챙ㅡ 하고 와인 잔이 쉴 세 없이 부딪혔다. 취한 것이 확연한 드렉슬러는 테이블에 이미 엎어져있었다. 닿을 듯, 말 듯, 손가락이 그의 손에 닿을 듯, 말 듯, 천천히 떨어졌다가 붙었다.
“자네는 모를 거야.”
어떤 마음으로 자네를 바라보고 있는 지를 말이야. 자네가 말하던 영원한 친구는 되지 못할 것만 같아. 그 앞에서 몇 번이고 중얼 거린 그는 휘청 거리는 몸을 잡고 술기운에 뱉은 말에 만족이라도 한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결국은 말해버렸다. 취중진담. 그런 것이 가장 유치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이리 되어버렸다. 나는 말이야. 드렉슬러. 자네를 정말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할 지 모르겠어.
술을 거하게 마셔버린 드렉슬러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그를 부축하여 둘이 자주 가는 술집을 빠져나간다. 딸꾹거리는 소리와 더운 술 냄새 그의 체취와 섞여버린 텁텁한 담배 냄새까지 오로지 그 인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길을 걸었다. 깜빡거리는 가로등의 불빛이 일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려. 조금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불편하지는 않는가? 그건 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술을 마셔야겠더라. 왜? 몰랐냐, 오늘은 네 생일이잖냐, 알베르토. 그랬던가? 기쁜 것을 감추느라 애쓴 그는 걸친 팔에 힘이 들어와서 머리를 마음껏 헤집는 그의 태도에 울렁거렸다. 눈앞이 핑 돌아 술에 취한 것처럼 발을 헛딛는다. 아닌 것처럼 굴더니, 역시 너도 취했군. 아닐세! 자네 때문에 중심을 못 잡은 것이라네! 그는 그리 말했으나, 드렉슬러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닫았다. 그의 표정은 어땠는지 감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인지, 어떤 모습을 자신에게 바라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내 그 표정이 풀리고 그는 그리 말했다. 겁을 먹었나? 그가 겁을 먹은 것은 그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와 같지 않았다.
그것을 알자마자 그는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단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덤덤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집 앞에서 헤어지면 되겠다. 라는 말을 덤덤하게 하는 그의 말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자네, 술이 깬 건가?”
“글쎄, 어느 정도는 깬 것 같군, 어느 정도는 말이야….”
애매모호하게 대답한 그는 손으로 괜히 움직여댔다. 미묘한 신경전이 되고 있었다.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듣지 못했던 것인지 그것으로 인하여 신경이 모두 솟다 못해 찢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잘가. 드렉슬러가 뒤에서 말했다. 그는 뒤를 돌아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슬 아슬 하고 그 조차도 몰랐던 그의 생일이었다.
그 날 이후로 변한 것이 있다면, 드렉슬러의 미묘한 태도이었다. 미묘한 태도라. 그 태도 하나로 알베르토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나치게 인식하는 드렉슬러의 태도에 그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가 바란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슴에서 응어리진 것을 뱉고 싶은 것이 전부이었다. 불경스럽고 더러운 것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어쩌란 말이던가? 숨이 막히고 말하고 싶은 그 표현하기 어려운 그 말을 어찌 숨기랴? 그의 미묘한 태도에 그는 사실은 수긍했을 것이다. 자신만 해도 이 불경한 감정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아니, 그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방적인 감정의 화살표는 오히려 독일 것이다. 고개를 저었다. 이것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깨진 유리를 어찌 이어 붙이는 가, 아무리 이어 붙이려고 하여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붙여도 이미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도망치는 것은 알베르토 그 자신이었다. 도망치듯 회사를 관두고 고분고분 그의 아버지의 말을 따른 것 또한 그의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그 방법이 되어 버렸다. 그는 비겁했다. 그것은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서랍에서 보내지 못한 편지를 그 곳에 집어넣었다. 다리오, 다리오 드렉슬러. 어디에 답을 보내야할지, 모를 편지를 그저 그의 손에, 그의 서랍에 집어넣어두는 것이 전부이었다.
*****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말은 조금은 이해가 가지만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시오.”
“당신이 이리도 매정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찔할 만큼 짙은 미소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안젤라 크리스토퍼.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을 그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만큼 짙은 눈을 가진 남자이었다.
“그래요, 내 의지로 당신과 결혼하진 했지만, 이런 대우를 받자고 결혼한 일은 아니에요.”
“그걸 아는 당신이 내 아버지께 결혼하겠다고 언질을 했던 것은 무엇일까?”
“당신을 가지고 싶었으니까요.”
“안타깝지만 안젤라, 나는 추호도 당신을 안을 생각이 없소.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 같군.”
“아뇨. 당신은 날 안아야만 할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릴.”
“다리오 드렉슬러. 그 남자를 만났어요.”
그 남자. 그 남자라는 소리에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남자를 어떻게 찾았지, 아니 애초에 당신이 왜? 라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돈을 주고 사람 하나를 붙여놓고 찾으라고 말하면 찾지 못하는 사람은 없죠.”
“하하, 이리도 영리한 영애가 그리도 많은 사내들 중에 나를 골랐는지 모르겠군, 그 날도! 그리고 지금도 말이야!”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 날도, 아니, 그날은 그저 사고였단 걸 당신도 알고 있는 일 아니었나요?”
“정말 똑똑해서 진저리가 나려고 하는군, 내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 줄 아나? 당신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지었고 그 잘못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당신이 나를 골랐다고 한 말을 정정해야겠군. 당신을 내가 골랐지. 멍청한 영애들 사이에서 가장 멍청한 당신을 말이야.”
“그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당신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요!”
“나 또한 당신이 한 방법으로 그를 찾으면 되는 일이야. 미안하지만 나가주길 바라지. 아니지, 당분간은 당신 친정으로 가있는 것은 어떤가? 가서 안부나 전하는 것이 어떤가?”
입술을 깨문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를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뽀얗고 하얀 아가씨를 저리 만들어버린 것은 도대체 무엇이던가, 철부지 아가씨의 모습은 어디 론가로 사라지고 저리도 다른 여자가 서있을까. 레이디 서약을 하기 위해서 그녀가 그를 속였단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애인 척 연기를 한 그 가증스러운 여자를 곁에 둔 것은, 결국은, 그와 닮았단 이유로 곁에 둔 것이다.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그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은 그 남자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녀와 결혼한 건, 멍청하게도 그이었다.
아아, 정말로 보고 싶어지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녀가 이미 찾아놓은 그에 관한 정보를 가로챘다. 어차피 그녀가 준 돈이야 그의 돈일 것이 뻔하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지 정확하게 적혀있는 파일에는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다리오 드렉슬러. 37세.
* 알베르토 로라스가 회사를 나간 이후로 반 개월 후에 마찬 가지로 퇴사.
* 연구실을 마련하여 여러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적기사단의 습격으로 인하여 자료를 모두 분실했음.
그는 꽤나 큰 결심을 한 것이었다. 회사를 나오면서 그에게 있었던 최소한의 안전선이 끊어진 것이었다. 인형 실 끊기 이후로 적기사단의 끈질긴 추격이 결국은 회사를 퇴사한 후에도 이어진 것이었다. 그는 괜찮을까, 괜찮을 것이다. 어디에도 다쳤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어떤 것을 만들고 있다고 말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의 최근 위치정도로 적혀있는 것이 전부인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보고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었다. 어찌 내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네가, 어떻게!’
그 분노의 찬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신의를 걷어 차버린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
그를 가두었던 반지에 스쳐 얼굴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친정에서 돌아온 그녀의 손찌검은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를 왜 찾은 거죠? 삼 년 만에 만난 그와 사랑이라도 나눌 생각이었나요? 그를 찾아서 결국은 뭘 어쩔 건가요?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요? 빠른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어찌 내가 그럴 수 있지? 아직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가증스럽기도 하지. 그녀의 얼굴을 매만진 그가 그리 말했다.
“당신이 놓친 것이 하나 있다면 그 남자는 나를 찾지 않을 거야.”
“어째서죠?”
“그는 나를 더 이상 그의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니 당신이 그리도 걱정할 이유는 없어. 당신이 할 일은 그저 우아하고 품위 있게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되는 것이야.
우습기도 하지. 그녀에게 그리 말했지만 그 스스로 당당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머리가 아파오고 가슴이 답답해져간다. 이리도 불경한 마음을 내 비출 생각을 감히 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를 사랑한 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 손가락이 저릿했다. 그 흔들리던 그의 눈빛을 전혀 잊을 수 없었다. 그 흔들리는 눈빛. 감정을 표했던 그날 보았던 놀란 그 얼굴을 어찌, 부정하는 것이 더욱 더 고역이었다. 의지와 상관없는 입술이 내뱉은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은 뛰고 있던 심장이었으니, 나는 너를 아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알베르토 로라스. 그의 말에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도망치는 것이 전부이었던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추악하고 씻을 수 없는 붉은 색 감정을 뒤집어 쓴 것은 자신이었다. 사랑하고 사랑해, 그것을 말하여 그를 상처 입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리도 싫어하는 친구라는 명분으로 서있던 놈도 결국은 그를 가지고 논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감정을 가지고 놀아버린 것이었다. 영원한 친구? 그런 것을 어떻게 내가 너에게 주었지. 그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덤덤하게 서있는 것은 그이었다.
이런 것을 받을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하하, 맞지. 넌 거절 했지. 멍청하게 군것은 나 혼자였던가. 그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아.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럼, 나는 네 새끼에게 욕을 할 수도 있겠지. 급작스럽게 올라온 멱살잡이에 눈을 감아버렸다. 성이 난 듯한 호흡소리가 그가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를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말을 해. 거칠게 놓아진 손보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차갑게 뒤돌아 선 그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말을 해. 아니. 전혀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어떻게 알베르토 네가! 그는 화를 최대한 억누르는 듯했다. 벽에 손을 몇 번 치고 손등에는 피가 천천히 맺히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알베르토 나가줬으면 좋겠어. 그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었다. 오히려 도망가고 싶은 것은 그였기 때문이었다.
툭툭 떨어지는 투명한 색의 액체가 무엇인지 알기에 그는 더욱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는 그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 혼자만의 감정이 결국은 들켜버리고 그에게 상처를 주어버렸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서글픈 것이다. 애초부터 이 감정은 신에게도 허락된 감정이 아니었다. 그에게 내뱉는다고 헌들, 더럽고 그 추악한 감정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황급하게 도망치고 또 다시 도망친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내쳐지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선택이 옳았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는 그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그에게 도망친 것이 옳았던 일일까. 그가 그 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눈빛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일이라고 그는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신을 잃은 멍청한 사람처럼 굴 것이다. 사랑, 그리도 지독한 감정 하나에 이리도 무너지고 크게 무너진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한 그 상대 앞에서 무너지고 또 다시 무너지고야 만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결과에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다시 도망친다. 이렇게라도 해야 만이, 그와 남겨진 유일한 고리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아,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왜 이리도 멀리에 있는 사람인가. 무너질 것만 같은 마음을 겨우 웅크려서 유지한다. 그의 거처를 확인한 주소만이 무겁게 눈을 가릴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차분하게 생각하고 손가락을 매만져도 답은 없었다.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여전히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 듯 뛰고 있었고, 그는 멍청하게 구는 것이 전부이었다. 잉크가 전부 쏟아진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잉크가 바닥에 떨어져 바닥의 카펫이 더러워졌다. 똑똑 흐르는 잉크의 소리에 온 몸의 긴장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적힌 주소가 엉망이 되었다. 다시 알 수 있는 주소이지만, 아직은 머뭇거리고 싶다. 잉크가 번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종이를 구겨버린다.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 날 자신을 거절하지 않았냐는 말. 그는 그리 대답했다. 글쎄.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 해. 라고 대답해 줄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되물었다. 그를 사랑하느냐고. 그렇기에 자신을 안지 않은 것이냐고. 그는 다시 대답했다. 글쎄, 당신 생각이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하군, 그는 그리 대답했다. 흔히 있는 연례행사에 그녀는 드레스를 갖춰 입었고 그는 익숙하지 않는 연회복을 입었다. 부드러운 장갑을 손에 끼우고 그녀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걸어 나갔다. 결혼 삼 년차의 이름으로 서있는 알베르토가의 대표인만큼 그녀와 그는 정숙하게 서있었다. 그녀는 부채를 들고 다른 이들과 서있었고, 그는 홀로 다른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화를 푸는 것이 꽤나 큰 파티라는 것을 알기에 내버려두기로 했다. 손에 쥔 글라스의 술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테라스로 걸어 나가 바라 본 하늘은 여전히 캄캄했다. 그가 바라는 별은 어디에도 없을 만큼, 여전히 캄캄한 밤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가 술이 떨어졌군, 중얼거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바람에 사락거리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안주거리 삼아서있는 기분이었다. 코끝이 조금 차가워지고 있었다. 무더위가 사라지고 성큼 겨울의 냄새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번 해가 지나면 그가 사라진지 사년 째가 되는 건가? 그를 기다리는 지난 시간들은 그를 화나게 할 수도 있었다. 처음 일 년은,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감정을 내 비춘 것이 그렇게도 잘못된 거냐고 드렉슬러를 닮은 허공에 대답을 요구했다. 답은 없었다. 일 년을 그리 헛되게 보냈더라면, 다음 해에는 냉정해졌다. 그가 한 선택이 옳았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 지금, 그가 미치도록 그리운 시간이었다. 그를 사랑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저 높은 하늘은 결코 우리를 이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는 그렇게 그를 내려놓았을 지도 모른다.
“안 들어오세요? 바람이 차요.”
어느새 안젤라가 그의 뒤에 서있었다. 드레스의 윗부분을 꼭 쥐고 서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그 소녀의 모습으로 서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그 모습을 갖추고 서있었다. 뒤에서는 다정하게 서있는 부부들 보세요. 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내려 보았다. 그녀의 눈은 나를 망신시키지 말아요. 라는 눈빛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입에 조소를 머금고 그녀의 팔을 잡고 허리를 잡고 한 곡 추겠냐며 귀에 속삭이었다. 그녀는 눈짓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정중하게 에스코트하여 무대 중앙에 선 그와 그녀는 누가 보아도 완벽한 선남선녀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눈은 결코 그녀의 눈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그 날이 떠오르네요.”
“그 날?”
“네, 당신과 내가 만났던 그 날.”
“아아, 그날 말인가.”
스텝과 스텝이 오가며 숨소리가 밀착될 만큼 가까운 거리, 그리고 앳된 소녀의 살 내음이 기억나는 그 날이 떠오르게 한다. 왈츠 음악이 끝이 나자 그는 몸을 멈추었다. 역시, 당신은 역겨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곱게 바른 입술 화장이 무색하게 그녀는 입술을 잘끈 물었다. 당신이 그럴 말을 할 처지는 아닌 걸로 알아요, 알베르토. 물론, 나 또한 그렇지만 말이야. 그는 그녀를 그렇게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이동했다. 순식간에 온화했던 장소가 시간이 멈춘 듯 아무 소리조차 나질 않았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다고 하네요. 라며 애써 파티 장을 수습해야만 했다. 안젤라는 침착하게 물 한잔을 마셨다. 그녀는 진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소유한 그 남자를 놓으려고 하는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결혼반지가 그녀를 울렁이게 만들었다.
그 날의 그녀는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서있던 하나의 상품이었다.
안젤라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몽롱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를 이리도 괴롭히듯, 그 또한 괴로울 것이다. 알베르토, 그 남자가 담당하지 못할 만큼의 더러운 세상의 거래가 아니었던가. 흔히 말하는 기사들의 '레이디' 본디 레이디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 것은 기사 그들이었다. 본디 알베르토가 서약을 하고자 했던 여자는, 그 여자는, 따스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녀는 흔한 갈색의 머리,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진 꽃을 팔던 한 소녀이었다. 그 소녀에게 기사 서약을 하겠다고 구는 그 모습에 노발대발 핏대를 세우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서있는 모두들이 소리를 죽였다. 그의 흔들리는 푸른빛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쩌면, 그 모습에 그를 얻고 싶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의 남자가 되어주길, 나의 2세는 저 남자를 닮았으면, 흔한 여자의 한 소망을 바랬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서있는 그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에게 달려가는 것은 꽃내음을 가득 담고 뛰어가는 한 소녀이었다.
울지 말아요. 그녀가 그를 품에 안으며 그리 말했다. 떨어지는 눈물과 흘러내리는 핏물 사이에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그 남자의 얼굴을 그녀는 마치 성녀라도 되는 듯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왜? 나는 당신 옆에 설수가 없는 거야? 멀리 바라보는 그와 눈으로 대화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꽃내음을 가득 안은 그 소녀뿐이었다. 당신의 레이디가 되기 위해 치장하고, 향수를 뿌리고 그리 한 것들이 모두 부질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들어갈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요. 아버지.”
한껏 힘을 주고 온 안젤라는 지독히도 무거운 패배감을 다른 귀족의 영애가 아닌 그저 꽃내음이 나는 소녀에게 그를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돌아가도 괜찮겠나? 라고 물어보는 아버지의 말과 무겁게 쳐다보는 그의 아버지의 눈빛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순수하고 바른 것만 바라보던 그 눈동자를 어떻게, 짓밟아야, 좋을까? 그녀는 미소 지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그를 제가 설득해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손바닥에 피가 맺히는 것이 느껴지고 입술이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괜찮아. 진정해 안젤라 크리스토퍼, 너는 결코 멍청한 영애가 아니야. 그녀는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그녀는 차에 앉자마자 눈물을 쏟아 내었다. 그 소녀의 얼굴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결코 그를 소유할 수 없어. 지독하게 긴 주홍 글씨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그 계집의 혀를 뽑아버려서 사창가에 팔아버려? 아니면 평생 불구로 살게 만들어? 어째서 고작 너 같은 계집이 그를 소유한 거지? 언제나 멀리서, 하고 싶은 말은 속에 담아 두고 다가가지 못한 내가 아니라, 피투성이의 기사에게 꽃을 내민 너 인거지? 투툭 떨어지는 눈물과, 핏물은 제법 괜찮았다. 진정해 안젤라. 네가 할 일은, 그게 아냐. 또렷하게 깨끗해진 정신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랬다. 지금 이리 우는 것이 아닌 다른 수를 만들어야한다.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었다. 진정해야만 했다. 흘렸던 눈물을 내리고 번진 화장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녀가 할 일은 깔끔한 티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계집들의 입은 언제나 위험하지. 그녀는 말끔해진 얼굴을 들고 가장 돋보이는 옷을 입고 티파티를 열 준비를 했다. 작은 여자 한 명쯤이야 이 세계에서 몰살키기는 법은 너무나도 쉽다.
“오랜만에 불러주셔서 기뻐요, 영애.”
“듣기로 알베르토 경의 레이디 간택이 있었다고 했는데 잘됐나요?”
그녀들의 물음에 안젤라는 대답했다. 아뇨, 평민 소녀에게 밀렸어요. 라는 말을 가장 가증스럽고 더럽게 포장하여 말한다. 알베르토 경이 돈에 눈이 먼 창녀에게 넘어가 결국 그녀를 레이디로 삼겠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 돼요 어째서 그 알베르토 경이? 고결한 그가? 그녀들은 놀란 듯 그렇게 대답했다. 저 또한 그래요, 어째서 그가 그런 하찮은 여자에게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라며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인 척 손수건으로 눈을 닦아대는 시늉을 보이었다. 진정해요 영애. 어떻게든 우리가 도와 드릴게요 라며 그녀들이 말했다. 그래요? 어쩌면 좋을까요? 우선 알베르토 경과 그 계집을 떨어트려놓아요, 나머지는 저희들이 알아서하겠어요 영애, 그러니 울지 말아요. 그녀들은 그의 아버지의 밑에 있는 이들이었다. 언제 자신들의 손을 놓을까봐 두려운 그런 존재들의 영애들이었다. 절박한 것도 절박하지만은, 굳이 이런 일에 손을 더럽힐 이유가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너무 가혹하게 굴지는 말아줘요, 어린 아이잖아요.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가증스러운 연극, 가면을 쓴 것은 그녀이며 주인공은 알베르토와 그 소녀가 될 것이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시작된 일을 어찌 무를까? 안젤라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먼저 자리를 피했다.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온몸이 떨려온다. 아무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었으며, 그에게 들켜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고작 아무것도 없는 평민 소녀에게 이리도 질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 자신을 무너트리는 일일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누르며 안젤라가 한 것은 초조하게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바란 것처럼 담백한 소문의 소녀는 어느 샌가 창녀가, 그는 멍청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소녀 앞에 서있었다.
“… 살려주세요.”
조근거리며 말하는 연약한 숨소리, 마치 작은 생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이 소녀는 조금 더 큰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그녀가 될 것이었다. 내가 널 살려준다면, 무엇을 줄 수 있니? 달콤한 목소리, 마치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가져가버린 마녀와 같은 속삭임을 그녀에게 말한다. 여리고 가여운 이는 이리 말한다. 무엇이든지,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살려만 주세요. 그 목소리에 그녀는 미소 지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너의 혓바닥을 뽑아서 널 창녀처럼 굴릴 수도 있단다. 가여운 아이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움켜쥐었다. 네가 무엇을 넘보았는지 아니? 전혀요, 저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그저 그 사람을 안아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안젤라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콱 하고 막힐 만큼 강한 악력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자 작은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네가 그 사람을 안아주려고 했던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이야. 안젤라는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지독하게도 또렷한 푸른 눈빛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불쾌한 느낌이었다. 이 천한 눈동자에서 결국 그를 볼 줄이야. 그녀는 처리해 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이동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피는 것으로 그녀는 불쾌한 느낌을 내려놓았다.
소식이 결국 그에게도 전달이 되었는지, 알베르토는 그녀를 지목했다. 안젤라 크리스토퍼, 그녀를 지목했다. 그녀는 입 꼬리가 올라갈 것만 같은 것을 애써 누르고 그에게 서약을 받았다. 누구나 언제나 바라는 기사의 서약, 그 서약을 그녀를 위해 한 것이었다. 애처로운 그 어깨를 쓸며 그녀가 말했다. 들었어요,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미안해요. 당신에게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해서. 다른 가면을 다시 쓴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냐. 안젤라, 안젤라 너는, 옳은 일을 한 것이야.
처음 만났던 날, 미소 지어주었던 그 소년을 얻은 것뿐이야. 수십 번의 거짓말을 하고 나서야 왼손가락에 화려한 반지를 끼게 되었다. 누구보다 착한, 그리고 강인한, 그가 바라는 여성상이 되어주었다. 더불어, 그를 얻기 위해 다른 것도 저질러 버린 것은 말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겨우 진정시켜 안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파티 장에 서있을 뿐이다.
알베르토는 먼저 나가 그의 의사를 만났다. 그동안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그의 진단을 받는 걸로 충당했다. 그는 검사 결과를 보며 의심하는 듯 알베르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꽤나 중독이 심하게 되셨습니다만, 노력해보죠.”
“역시, 그렇군.”
알베르토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밤마다 그를 괴롭히는 환각 증세, 그리고 결혼식을 하기 전의 나약한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마약으로 인한 것들이었다. 마약이라니? 그 소식을 접한 것은 다행히도 늘 그의 건강을 체크해주던 의사가 있었기에 빨리 알아챌 수 있었던 일이었다. 이 증세가 환각을 보여주기도 하나? 그가 물었다. 환각 증세를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그 정도의 량은 아니네요, 그가 대답해주었다. 촉각이 무뎌질 수도 있는 것인가? 그가 물었다. 글쎄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손목이 부들거리는 그를 본 그가 걱정이 되었는지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그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아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었네.”
다만 그가 궁금했던 것은, 그 날 그가 환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라는 작은 생각이었다. 아무튼, 앞으로 조심하세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인간은 한없이 추악해질 수 있었고, 추악함의 오물을 뒤집어 쓴 것을 어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헛웃음을 내뱉었다. 멍청한 것은 그 또한 이었다. 말에 넘어간 것도 모두 마약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는 멍청했던 것이다. 서로의 명분이 필요하다고? 멍청한 알베르토, 그녀는 명분이 아니라 너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어. 눈앞에 드렉슬러의 말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드렉슬러, 이리도 애타는 마음을 자네가 알 수 있겠는가? 환상에 빠져서도 자네를 바라볼 줄이야. 어찌도 한심한가? 그는 눈을 감았다.
돌아오자마자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안젤라의 식사하라는 목소리도 전혀 듣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시끄럽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의자에 기대어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었고, 몽롱해지는 정신 사이에서 안젤라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정신을 똑바로 떴다. 서재의 문을 열고 나가자 안젤라는 어떤 사람에게 손목을 저지당하고 있었다.
“당신 손님인가?”
전혀 아닐 것 같은 손님의 방문인 것을 알지만,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어보자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파티 장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만 그렇게 굴라고, 이 집에서 당신에게 그런 사람을 데려오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수치심에 물든 안젤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보기에 그 사람은 꽤나 큰 옷을 입은 사람인 것 같았다. 얼굴이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얼추 그와 비슷한 체형인 것 같았다. 설마 하는 눈동자가 그의 눈빛에 담기었다. 아직도 내가 약에 취한 것인가? 헛웃음을 치며 그는 눈을 깜빡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놓아주세요!”
“아하, 실례,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시종인 줄 알았는데 발정이 난 암캐였군.”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아니라는 불확실적인 확신, 모자를 벗은 남자 앞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가장 멍청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 전부이었다.
“편지를 읽지 않았던가,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는 건 무슨 반응이냐?”
그가 물었다. 큰 모자에 벗어난 얼굴은 더럽게도 매일 매일 그려온 그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 남자의 얼굴은 조금 탄 것이 전부이었고, 자잘한 흉터들이 온몸에 남아있었다. 그가 회사를 나가고도 적기사단들의 탄압이 계속 되었단 소식이 사실인 것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그 사이 사이 남아있는 굳은살만 그가 있다는 것을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거친 손바닥과 따스한 온기는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확실시하게 만들었다.
“자네는 변한 게 없군.”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바라보는 눈빛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그의 신의를 거절하고 다른 마음을 품어버렸으니까 어떤 말을 해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표정이 굳고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 한 순간을 안젤라가 저지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는지 다급하게 굴었다. 이런 순간에 그녀는 똑똑했다. 이것이 촉이라는 건가? 알베르토는 손님 대우를 잘해주라는 듯이 그녀에게 지시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무는 것이 전부이었다. 그가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자유를 담은 눈동자와 가을 노을을 담은 것만 같은 머리이었다. 익숙한 그 모습은 꽃내음이 가득하던 그 소녀를 떠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그 소녀 또한 사실은 저 남자의 대용이 아니었을까? 안젤라의 뇌리에 설마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쪽 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이의 친우라고 하셨으니 편히 대하셔도 괜찮습니다.”
“누가 그 녀석의 친우라고 하는 거지? 입 조심해 멍청한 계집.”
“무례하시군요.”
“무례라, 네 년이 알베르토에게 한 짓보단 덜 무례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알아보니 꽤나 재미있는 여자더군, 안젤라 크리스토퍼.”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식적이야 아주.”
그의 말에 그녀는 애써 웃음을 담은 채 방문을 닫고 나왔다. 저 남자는 아는 것이 있었다. 아니, 그래도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의 남자도 사실을 알고 결혼해주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당당해질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멍청하게 벌벌 떨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안젤라는 몸을 폈다. 멍청하게 떨 시간 동안 그이에게 사랑받을 방법이나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그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환각성분이 있었던 마약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3년 동안 몰래 복용시켰건만,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얻은 것이라고는 시리도록 푸른 눈빛이 전부이었다. 아마 그것 또한 알아차렸을 지도 모른다. 아무 말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는 그녀가 필요하단 사실이었다. 안젤라는 묘한 쾌감에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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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이미 냈었기 때문에 30페이지 까지만 공개합니다 전체 10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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