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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5 수정
뒤늦은 절망감은 온 몸을 감싸다 못해 패배감마저 느끼게 만들고야 만다.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돌았던 붉은 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돌아온다. 깊은 한숨을 쉬고, 다시 숨을 내쉬었다. 문 뒤로 들리는 서로의 환희에 찬 숨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귀를 막았지만, 들리는 타인과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이와이즈미.”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애꿎은 벽만 내려쳤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에게 느끼는 패배감은 한 번이면 족했으나, 애석하게도, 오이카와에게 느끼는 패배감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아마도, 제가 숨쉬고 있는 동안은 영원히 그러겠지.
쾅, 쾅. 쾅. 내려치던 벽의 소리가, 서로의 감정을 인식한 연인들에게는 그저, 작은 소음이라고 밖에 안 되겠지. 그걸 알면서도 참, 스르르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그냥, 네가 너무 좋았을 뿐이야. 단지,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저, 말하지 못한 사이에, 그런 사이에, 알 수 없는 빌어먹을 저 틈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이다. 나와는 다른 유대감. 서로만 알 수 있는 그 시선의 유대감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하나의 속박이었다. 허탈함에 웃음만 흘렸다. 하, 하. 그래보아도 너는 듣지 못하겠지만. 들리는 소리는 이제 점차 격해지고 있었다. 내 앞에서 울어주길 바랬던 넌, 이미 다른 사림의 것이 되어있었다.
눈으로 쫓던 사람이 계속 보이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인식하고 대답할 뿐이다. 아니라고 생각하기에는 커져오는 고동 소리와, 그를 따라 가는 눈의 대답이 있었다. 네 뒷모습.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졌을 뿐인데. 그랬을 뿐이다.
“마츠카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다.”
“아, 아침을 안 먹어서?”
“시답지 않긴.”
퍽이나 시원하게 웃으며 가슴께를 쳐온다. 이제는 미쳤군. 바라보는 시선이며, 무엇이건, 다른 사람의 것인 걸 알면서도 좋다는 것을 온 몸이 인식하고 있다. 싫다.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는지는 몰라도 느껴지는 시선이 대답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맛층, 똑똑하면, 알 텐데. 그러면, 어떻게 할지도 알지.”
빌어먹을 오이카와. 육감은 뛰어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오싹하게 밀려오는 오싹함이 오이카와를 응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시선을 다시 내리고, 올려보니 보이는 것은 이미 그의 어깨를 감싸고 누구의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 남자의 벅찬 소유감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고야 만다. 결국 미끌 거리던 공을 놓쳤다. 스르륵 배구공을 다시 돌려도 공이 제 손에 감기지 않는다. 집중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 분명했다. 짜증이 솟구쳤다. 왜, 다시 식어, 식어 내리란 말이다. 미끌 거리던 공을 신경적으로 벽에 쳤다. 빗겨 친 공만큼, 손이 얼얼하다. 지쳐 떨어지는 듯 바닥에 엎어졌다. 눈을 다시 가리고, 생각을 한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춰버리고 싶을 만큼.
“너무 그렇게 보지 않는 게 좋지 않으려나.”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나.”
“그래도 말이야, 네 판단이 고작 그 정도라니, 실망인 걸. 마츠카와.”
“오이카와.”
“네 선은 거기까지야. 코트에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는 정도. 그리고 벤치에서 그를 바라보는 정도라고. 그 선을 지켜. 네가 늘 그래왔던 포지션인 만큼.”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이다. 오이카와. 누가 그더러 멍청하다고 평할까. 저렇게 똑똑하기 짝이 없는, 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수컷의 행동인데 말이다.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쓸데없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예민도가 높아지면 경기에 민감하게 보이곤 했다. 헉헉 숨을 쉬고 음료를 들이킨다. 제 시선에 닿은 이와이즈미는 수건을 가져다 대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기분 좋게 미소를 흘린다. 할 수 있을까. 저 들만 바라보고 있는 그 세상 속에 감히 발 끝을 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쓴 웃음만 터질 뿐이다. 그럴 수 없다. 그 세상 속에는 애석하게도 제가 없다. 그것을 아니, 시선을 거두고 위를 바라볼 뿐이다.
“마츠카와.”
“하나마키.”
“오이카와 녀석이 지나치게 민감도가 높던데, 네 탓이야?”
쓸데없이 눈치를 잘 읽는다. 아무 말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경기 도중이야. 하나마키는 제 시선을 눈치라도 챘는지 말했다. 그래, 경기 도중이지. 그것을 잠시 잊을 뻔했다. 어깨를 툭툭 친다.
“쓸데없이 힘 쏟지 마라.”
“무슨 의미야?”
“알면서 그러냐? 네가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사이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한방 먹었다. 마른 세수를 하듯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랬다면, 하나마키. 너는 어떤 답을 주었을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포기해. 마츠카와. 그런 불필요한 일에 네 힘을 쏟을 필요는 없어.”
“알아.”
“알면 접어. 분위기 망치지 말고.”
하나마키의 말은 비수처럼 내리 꽂는다. 그거라도 막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별 수 없다. 그게 가능할 리가.
“나 조차도 눈치를 채는데, 조심해. 이러다 이와이즈미가 알아채면 곤란할 걸. 여러모로.”
“알고 있으니까, 집중하자고. 하나마키.”
“너나 잘해.”
메마른 입술을 문지르고 다시 코트로 나선다. 이 빌어먹을 감정도 공이 나가고 튀쳐나가는 그 순간처럼 사라지면 정말로 좋을텐데. 그러면 너무 나도 좋을텐데.
“집중해서 가자고.”
다시 막아, 감정의 둑을 막는 것 마냥, 막아버리자.
“마츠카와, 얼굴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냐?”
“아니, 별로, 그렇게 관찰하지 않아도 알 텐데.”
시합이 끝이 나자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들켜버렸는지 이와이즈미에게 아주 조금 감정을 흘려본다. 그랬더니 날아오는 비수들이 있다.
“맛층.”
“마츠카와.”
“그렇게 날이 서긴.”
피식 하고 웃으며 뒤를 돌아간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의 관계도 아슬아슬하게 이어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의외로 질투를 하는 이였고. 하나마키는 이 분위기를 이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똑똑한 이였다. 이래서 아오바죠사이 3학년 팀워크가 좋단 소리가 나오지.
“맛층. 더 이상 나를 자극해서 얻을 것은, 없을 텐데.”
“알고 있어. 오이카와. 노력 해볼 테니 그렇게 날 서지 마. 이렇게 대하는 건, 너도 불안하긴 한가봐? 불안이라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마츠카와 잇세이.”
“그렇게 자극하지 마. 오이카와. 노력할 테니까.”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친다. 알 수 없는 기류. 그 기류에 오이카와 녀석 눈을 흘기고는 제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 그의 어깨를 감싸고 간다. 그의 어깨, 그리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떨어진다. 애들 하는 장난도 아니고, 질투를 하는 꼴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그 입술을 물고 떨어진다면, 상처 입은 다리를 문지르는 것이 나라면.
그렇게 된다고 헌들, 무엇이 달라질까. 바스라 지는 마음을 눌렀다. 누르고, 또 누르자. 혹시 알까. 십 년의 유대감이 뭉개지는 순간이 다가올지. 천천히, 덫을 만들자. 그렇게 해버리면, 그렇게 해버린다면?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라, 온전한 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기뻐해라. 덫을 만들어서 후에 얻는 것은 이쪽이 될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갈 수 없는 인터하이, 막혀버린 벽들은 애석하게도 서로를 울게 만들었고, 현실의 벽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당연히 프로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에 대학에서도 그를 잡기 노력했다. 천재 세터. 그 걸로도 충분한 내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같이 노력을 쏟은 것이 이와이즈미 히지메 라면, 놀랄 일이지.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은, 같은 곳에 가는 것뿐이다. 원서 접수, 그리고 시험까지. 준비가 철저했음에 가능한 결과였다.
“독한 놈.”
저더러 하나마키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덫을 점차 만드는 것은 쉽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너무 나도 자만스러운 이다. 아주 큰 불안을 가지고 있지만은, 불안을 들고 표출하지 않은, 자만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불안을 심어 주는 것은 쉽다. 그리고, 그것을 분출하게 만드는 것도 쉽다.
“무슨 속셈이야.”
“단지 내 성적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때? 오이카와 토오루.”
“어디까지 방해할 셈인지 묻고 있잖아. 맛층.”
얼굴을 전혀 풀고 있지 않다. 그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난다. 완벽하게 긴장하고 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게 긴장하고 있었다. 세간에서 아무리 천재다. 범인이라고 하여도, 그 또한 결국 감정과 사람 앞에 긴장하고야 마는 하나의 인간임에 분명했다.
“내 덫에 얌전히 이와이즈미가 걸려 들 때까지 멈추지 않겠지. 오이카와 토오루.”
“그거 참 재미있는 농담이야.”
“아주 즐거운 진담이 될 테니까.”
“마츠카와 잇세이.”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 오이카와, 나는 충분히 숨을 죽이고 기다릴 뿐이거든.”
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여전히 저를 노려볼 뿐이다.
“뺏기는 것이 두려워? 두려우면, 얻을 때 조심했어야지.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을 독점하려하면, 당연히 그래야지.”